“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4월 13일 미국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가 개최한 자리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세계 경제와 미국의 경제 리더십에 관한 특별 연설이었다. 옐런 장관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형성된 브레턴우즈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평가하고, 이제는 경제적 효율만이 작동하는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핵심적인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는 우호적인 국가들과 함께 기존의 낡은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프렌드 쇼어링을 통해 이제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안전한 교역(free but secure trade)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옐런 장관의 연설은 현재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질서의 재편 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미국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동맹과 관계를 강화하며 노동과 환경 분야에서 높은 기준을 담고 있다. 프렌드 쇼어링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경제적 효율성을 좇아 공급망을 팽창하던 오프 쇼어링(off-shoring)이 끝나고 본국으로 제조업 귀환을 의미하는 리쇼어링(reshoring)을 거쳐 이제는 우호적인 국가들과 교역 관계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통상정책을 대변한다.
신냉전 도래와 다자주의 쇠퇴
1991년 동서 간 냉전이 종식되며 국제통상은 다자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서방 진영 내의 교역 체제였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세계무역기구(WTO)로 업그레이드되면서 규범에 의한 국제통상질서가 확립됐다. WTO는 교역에서 회원국 간 차별과 위장된 무역의 제한을 금지하는 등 규범에 기초한 다자통상 체제를 이끌었다. 회원국 간 합의된 규범을 위반하면 WTO 분쟁 해결 절차를 통하도록 했고, 패소국이 판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무역보복조치를 허용했다. WTO라는 다자규범 체제는 탈냉전기 약 30년간 세계 교역의 성장을 이끈 중요한 동력이었다. 동서 간 체제경쟁이 없었던 이 시기에는 경제적 효율이 우선됐고, 글로벌 공급망이 전 세계로 확장하는 시기였다. 냉전의 한 축을 이루던 중국도 2001년 WTO에 가입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급성장했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은 신냉전을 촉발했다. 서방 진영은 급성장하는 중국을 중국위협론으로 견제했다. WTO 체제에 편입한 중국이 자신들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점도 이를 악화시켰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눈에 띄게 중국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중국 때리기가 본격화되면서 미·중 간 신냉전이 시작됐다.
대선 기간에도 중국과의 대결 구도를 숨기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유엔(UN) 총회 연설에서 이를 명확히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공동으로 사회주의 세력에 대응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회주의 체제 실패를 강조하며 베네수엘라를 거론했지만, 연설을 듣는 중국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가 기대됐다. WTO를 정상화하고 다자주의적 국제협력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국제통상에 관한 한 트럼프 행정부의 유산(legacy)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대중국 견제는 더 세련돼졌으며, 미국의 상소기구위원 선임 반대로 그 기능이 정지된 WTO 상소기구 정상화도 요원해 보인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미국의 중국 견제는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더 용이하게 반덤핑 및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법 제도를 정비했다. 바이든 행정부도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해 유럽연합(EU), 일본 등과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아울러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미국, 인도, 호주, 일본으로 구성되는 쿼드(Quad)의 확대를 꾀하고, 인도·태평양 경제협력 방안(IPEF)을 선언했다. 쿼드는 2007년 최초 결성되고,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2017년에 본격화된 협의체다. 대중국 견제가 목적으로, 2021년 3월 쿼드 공동선언에서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을 표방하고 있다.
2021년 10월 바이든 대통령의 발표로 공식화된 IPEF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세계 경제가 직면한 도전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시작됐다. 미 무역대표부(USTR)와 상무부가 협상을 주도하는 IPEF는 4개 핵심 분야(pillar)로 구성돼 있다. 첫째 분야는 노동과 환경 그리고 디지털 표준을 포함하는 공정하고 회복 가능한 무역이다. 둘째 분야는 회복력 있는 공급망이다. 셋째 분야는 미래 산업에 대한 인프라 구축과 클린에너지로 전환, 그리고 탈탄소화다. 넷째 분야는 세금과 반부패다. 참가국들이 4개 핵심 분야 중에서 가입을 원하는 분야를 선택하도록 해 아·태 지역 국가의 유연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단, 한 분야에 가입하면 해당 분야에 속하는 세부 사항에는 모두 동의해야 한다.
새로운 교역질서의 대두
IPEF의 출범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전격 탈퇴해 아·태 지역에서 미국이 가입한 국제통상 협정이 부재하다는 점이 고려됐다. 중국이 TPP 후속협정인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공식 신청했고, 중국이 주도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이미 발효한 것에 자극받은 측면도 있다.
IPEF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IPEF는 전통적인 국제통상의 문법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국제통상협정의 기본요소인 상대국 시장을 개방하는 시장접근 분야가 빠져있다. 국제통상협정 체결 권한을 가진 미 의회가 대통령에게 이를 위임하는 무역촉진권한(TPA)이 2021년 7월 종료된 것도 전통적인 국제통상협정과는 다른 형식으로 출범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IPEF는 새로운 형태의 아·태 지역 협력체를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뒤처져 있다는 인식하에, 1994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기반한 WTO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도 포함돼 있다.
전환의 시대,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세계는 WTO로 대표되는 다자규범이 약화한 교역질서에 대비해야 한다. 탈냉전 기간 융성했던 다자주의는 이제 쇠퇴하고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는 국가들 위주로 교역하는 경제동맹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경제동맹은 안보를 위해 그간 누려왔던 경제적 효율의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미국은 지난 약 30년간의 다자무역 체제를 재점검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교역질서를 구축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안보의 차원으로 그 중요성이 격상된 공급망의 회복력이 포함된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동과 환경, 특히 탈탄소 경제로 전환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디지털 경제도 빠질 수 없다. 여기에 더해 IPEF는 첨단산업의 기초가 되는 인프라 개발과 세금, 반부패 분야까지 협상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기존의 국제통상 프레임에서 과감히 탈피해 대응해야 하는 주제들이다.
세계 경제에 새로운 도전이 부상하고, 체제 간 경쟁이 재연되는 신냉전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이 어렵다면,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체제로 재편되는 전환의 시기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위기에 맞서 더 개방적으로 대응해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폐쇄된 국가의 예에서 보듯이 고립될수록 득보다는 손해가 크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