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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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일본의 생물학자 이마니시 겐이치는 ‘공진화(共進化)’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백한 마리째 원숭이’라는 책을 썼다. 공진화란 동물에게 적자생존 같은 생존 경쟁만 있는 게 아니라 협력 관계도 존재하며, 개체만의 진화가 아니라 함께 진화해 나간다는 내용을 담은 이론이다. 

책 내용은 이렇다. 1950년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의 무인도 고지마(辛島)에 일본원숭이가 집단 서식하고 있었다. 교토대 영장류연구소 학자들은 이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길들이기에 성공했다. 먹이는 흙투성이 고구마였다. 어느 날 한 원숭이가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바닷물로 씻은 고구마는 염분이 섞여 있어 맛도 좋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원숭이가 따라 했다. 그러다가 무리의 반 이상이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에 이르렀다. 더 놀라운 건 이런 집단 행위가 멀리 떨어진 다카사키산에 서식하던 원숭이 무리에서도 발견됐다는 것이다. 두 곳의 원숭이 간에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백한 마리째 원숭이는 지금도 사회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사례로 인용된다. 특정한 행위를 하는 개체 수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그 행동이 집단 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리나 공간을 넘어서까지 확산한다는 의미다. 특히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고 굳이 교류가 없어도 공명된다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21세기에 나타나는 공진화 사례

넓게는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논의부터 좁게는 마케팅 변화에 관한 이론까지, 21세기 들어 끊임없이 제기된 의제가 있다. 진정성과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마켓 3.0, 사회 참여하는 소비자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제기됐던 개념은 공진화처럼 경계 구분 없이 서로 공명하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말한 알렉스 에드만즈(Alex Edmans)는 그의 저서 ‘ESG 파이코노믹스(Pieconomics)’에서 이제 기업은 주주(shareholder)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머물러선 안 되고 모든 이해 관계자(stakeholder)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소비자와 사회, 국가도 기업 활동의 주요 고려 사항이 돼야만 자본주의가 한 단계 올라간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해 관계자를 위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사업적인 관점에서도 타당한 선택이며, 가치와 이윤을 동시에 창출하는 기업이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 것이다. 

제품 중심에서 소비자 지향으로 그리고 가치 주도로 시장이 변해왔다고 주장한 마켓 3.0이 나온 지 10년이 넘어간다.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기업이 생존하려면 소비자에게는 미션을, 구성원에게는 가치를 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파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말이다. CSR도 맥락은 비슷하다. 기업 활동 과정에서 수행하는 모든 활동에 사회적인 책임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 기업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CSR의 핵심이다. 기업이 경영 활동에서 사회적인 책임을 고려하면 기업의 재정적인 이익과 이해 당사자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다. 

‘기업 시민(Corporate Citizenship)’도 같은 맥락이다. 기업도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사회에 공헌해야 하는 시민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해외 진출한 다국적 기업은 현지에서 기업 시민으로서 환경이나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융화돼야 한다. 이런 모든 주장은 근본적으로 정부, 기업, 가계로 구성된 경제 3주체 중 기업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윤 추구만을 용인하게 되면 기업이 미치는 영향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고민이 바탕에 깔려 있다. 기업의 역할을 보다 친사회적, 친환경적으로 바꿔야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이 커진다는 관점인 셈이다. 최근에는 이 모든 흐름이 ESG로 귀결되고 있다.


 

목적이 이끄는 브랜드란

기업 활동 변화를 촉구하는 이런 흐름은 기업과 브랜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목적이 이끄는 브랜드, 즉 ‘브랜드 목적(brand p-urpose)’이 브랜드 담론을 이끄는 현상이다. 원래 이것은 브랜드 존재 이유나 목적을 밝히는 것이 그 미션이다. 미션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기업의 존재 이유와 존재의 고유성을 밝히는 것이다. 둘째는 비전 달성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비전이 구체적이면(예를 들어 2030년까지 매출액 얼마 달성과 같은) 구체적일수록 미션을 고유한 존재 이유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진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예 미션이나 비전 대신 브랜드 목적만을 표방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비전은 내부 공유용으로만 활용하면서 소비자가 기대하는 것과 이해 관계자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치를 브랜드 목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브랜드 활동을 집중하는 ‘목적 주도 브랜드(p-urpose-led brand)’가 등장하고 있다. 소비자는 이제 양질의 제품을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는 브랜드를 무작정 좋아하지는 않는다. 제품과 서비스 차원을 넘어 자기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자기 신념이나 가치관을 반영해주는 것을 브랜드 목적으로 설정하는 기업을 선호한다. 

브랜드 목적은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가’를 뜻한다. 그래서 브랜드 목적에는 개인이나 가족의 행복,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방법, 사회와 환경의 지속 가능성 등 중요한 가치가 들어가야 한다. 구글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모두가 쉽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한다’를 브랜드 목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아래는 여러 글로벌 브랜드가 설정한 브랜드 목적이다. △나이키(세상의 모든 운동선수에게 영감과 혁신을 가져다준다) △이케아(더 많은 사람에게 더 나은 일상생활을 창조한다) △링크드인(전 세계 전문가가 더 성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서로 연결해준다) △메타(커뮤니티를 구축해 세계를 더 가깝게 만드는 힘을 준다)


브랜드 목적 수립 방법

실체 없는 브랜드는 세련된 거짓말이다. 브랜드 목적도 구체적인 실체와 연계성이 있어야만 성립된다. 브랜드 목적을 세울 때는 두 가지 측면을 탐색해야 한다. 첫째는 브랜드에 내재한 실체 있는 위대함을 탐색해야 한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해 왔고, 앞으로 무슨 일을 왜 할 것인지가 주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름 자랑스러운 브랜드의 자산인지를 되물어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는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보는지, 또 어떤 가치와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정리하는 것이다. 첫 번째가 내재한 위대함을 찾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브랜드 세계관을 정리한다. 여기서 공통으로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단기적인 성과를 넘어 브랜드와 고객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 주제, 시대를 초월해 고객의 삶을 개선하는 비즈니스 기본 원칙, 소비자를 넘어서 인간 자체에 뿌리를 둔 비즈니스 프레임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브랜드 목적이다. 

차별화는 영원한 숙제와도 같다. 브랜드 목적을 굳건하게 세운다는 것은 제품이나 서비스 차원이 아닌 ‘존재 차원의 차별화’를 도모한다는 뜻이다. 좀 더 낫거나 약간 다른 브랜드가 아닌 아예 존재 자체가 남다른 브랜드가 되려는 것이다. 그러면 성과는 따라오게 돼 있다. “이윤의 땅에 다다르려면 목적의 길을 걸어라”라는 에드만즈의 말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