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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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떨어져야 날개를 편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저서 ‘법철학 강요’에 기술한 문구다. 어떤 현상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는 사건이 마무리되고 오랜 시간 역사적인 맥락을 고찰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이 사회혁명이든 산업혁명이든, 혁명이라 정의되기 위해서는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완료된 이후 오랜 시간 치열한 논의를 거쳐야만 한다. 프랑스 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이후 한 세기 동안 사회적 논의를 거친 뒤에야 혁명의 칭호를 획득했다. 산업혁명 역시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이후 도입된 개념이다.

2016년 1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처음 선언된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은 직후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확정된 미래로 자리 잡게 됐다. 이세돌 기사의 충격적인 패배를 통해 우리는 인간 고유의 역량인 통찰력, 감, 직관, 촉 등이 기계에 의해 복제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인류 최고 수준의 역량도 기계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생생한 날것으로 목격했다. 이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은 기정사실이 됐다. 내 직업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 즉 공포감이 일었다. 당시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정책적 지향점으로 4차 산업혁명을 선택한 것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직관적인 공포와 국가적 지원의 결합은 황혼이 진 후에만 날개를 편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대낮에 훨훨 날도록 만들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혁신가와 기술기업은 미래에 대한 나름의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고, 유사 이래 인류가 풀지 못했던 많은 난제와 부조리를 기술을 통해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줬다. 노동으로부터 인류가 완전히 해방되는 미래도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단 조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기술혁신은 그 자체로 선(善)의 지위를 획득했다. 4차 산업혁명에 뒤처지는 것은 생존경쟁에서 도태되는 것과 동치였고, 혁신을 위해서라면 다수의 약자가 얼마간의 희생을 하는 것마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3년 전, 본 칼럼 시리즈는 ‘4차 산업혁명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포문을 열었다. 당시의 4차 산업혁명은 공포 마케팅에 기반한 상업적이고 선동적인 의제이기에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산업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이 사회의 보편적 지향점에 부합하는 가치를 창출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인지하는 4차 산업혁명은 3년 전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많은 사람이 4차 산업혁명을 지나간 유행어처럼 여기기 시작했으며, 사회적으로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열기가 많이 식은 상태다. 단적인 예로 조선일보에서 생산했던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지면 기사의 수는 3년 전과 비교하여 3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진 바 있다.

기술혁신을 대하는 사회적 관점 역시 극적으로 바뀌었다. 혁신기업에는 규제의 칼날이 무디기만 했던 상황을 활용해 삼성 같은 전통적 대기업 집단은 꿈도 꿀 수 없는 문어발식 경영을 많은 플랫폼 기업이 답습했다. 

그 결과, 일부 혁신가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으나,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국가대표 플랫폼 기업 카카오는 골목상권 파괴자의 오명을 쓰고 ‘국민 밉상’ 기업이 돼버렸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배달 산업을 석권했던 배달의민족은 독일의 딜리버리 히어로에 합병되며 ‘게르만의 민족’이 돼버렸고, 포스트 코로나19가 거론되는 오늘날 배달 오토바이의 불법 운행이나 너무 비싼 배달료 논란으로 사랑받는 혁신기업이 아니게 돼버렸다.

스마트 모빌리티의 선두 주자였던 전동 킥보드는 장관 관심 사업으로 지정돼 2020년 5월 관련 규제가 전면적으로 사라지는 특혜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우려했던 바와 같이 규제가 느슨해진 몇 개월 남짓한 짧은 시간에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규제개혁 불과 7개월 후 전동킥보드 산업은 과거보다 더욱 강력한 규제를 적용받게 됐고, 짧은 전성기의 막을 내리게 됐다.

새로운 탈중앙화된 화폐 시스템을 창출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암호화폐 역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국산 코인의 대표주자이자 한때 세계 암호화폐 시장의 시가총액 기준 상위 10위 안에 들었던 루나 코인은 불과 일주일 만에 150만분의 1 수준으로 가치가 폭락했고, 창시자인 권도형 대표는 폰지 사기 혐의로 사법 시스템의 도전을 받고 있는 상태다.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경제수장들이 암호화폐에 대한 우려를 본격적으로 표하기 시작했으며, 암호화폐 생태계를 크게 흔들 규제 역시 다수 예고됐다.

작년 6월, 미국에선 조 바이든 정권의 출범과 함께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으로 ‘아마존 저격수’ 리나 칸 교수가 취임했으며, 그 직전 민주당과 공화당이 초당적으로 협력하여 소위 ‘빅테크 반독점법 패키지’를 하원에 발의했다. 온라인 플랫폼 독점을 필두로 총 5개의 세부 법안으로 이루어진 패키지는 노골적으로 거대 디지털 플랫폼 기업만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리나 칸 위원장의 취임과 초당적인 반독점법 발의는 미국의 정치권력이 혁신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그 혁신이 사회가 합의한 공공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규제의 철퇴를 날릴 것임을 명확히 선언했다는 함의가 있다.

안타깝지만 혁신가들에게 최소 앞으로 한 동안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선언된 2016년 직후 몇 년간의 황금시대가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간의 기술혁신은 눈부셨으나, 그것이 인류 차원의 난제를 해결했다거나 혹은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코로나19 사태와 맞물려 천문학적인 부를 소유한 극소수의 혁신가들이 출현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인공지능(AI)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인류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날은 여전히 요원하다. 기술혁신에 맹목적인 가치를 부여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4차 산업혁명은 있는가

답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사회적 담론의 단초를 제공한 AI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발표되는 AI 분야도 한때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손을 뗀 시기가 있었다. ‘인공지능 겨울(AI winter)’이라 불리는 20여 년의 기간이다. 그 엄혹한 시기, 토론토대의 제프리 힌턴 교수는 사기꾼 소리까지 들어가며 심층신경망(Deep Neural Network) 연구를 뚝심 있게 진행했고, 캐나다 정부는 500만달러(약 63억8000만원)의 연구비를 힌턴 교수에게 지원해주며 묵묵히 기다려줬다. 2006년, 힌턴 교수는 딥러닝에 대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고, AI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20년간의 AI 겨울을 종료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혁명이 달성되기 전 가장 힘들고 어두운 시기를 신념을 바탕으로 끝까지 버텨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과실이 돌아가는 법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4차 산업혁명을 상업적 유행어 혹은 특정 정권의 정책적 지향점 정도로 정의해버린다면 그 불꽃이 사그라들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필자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장밋빛 미래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시점이 우리 사회가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적기라고 믿는다. 먼 훗날 시대의 황혼이 저물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현재를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 정의했을 때 가장 큰 과실을 얻는 것은 우리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실이 일부 혁신가에게만 머물지 않고 절대다수의 구성원이 널리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