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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미시간대 LL.M.,  연세대 공학대학원 석사, 사법 연수원 21기, 서울대 법학 박사, 전 법원행정처 총괄국제심의관, 전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박성수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미시간대 LL.M., 연세대 공학대학원 석사, 사법 연수원 21기, 서울대 법학 박사, 전 법원행정처 총괄국제심의관, 전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수출입이 국내총생산(GDP)의 80%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경제활동은 곧 국제 비즈니스를 의미한다. 활발한 국제 비즈니스는 국제적 분쟁의 해결 수단을 요구하게 되고, 국제중재가 그 중심으로 대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인수합병(M&A), 수출·수입된 첨단장비, 혹은 건설 관련 분쟁이 국제중재를 통해 해결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국제화와 함께 현대 사회를 규정하는 다른 하나의 흐름인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메타버스(metaverse·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 자율주행 등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혁신의 성과를 보호함을 전제로 한다. 지식재산권(IP·Intellectual Property)의 보호는 곧 사회의 존립 기반이며, 이제 S&P500 기업의 자산가치 중 90% 이상이 IP라는 보도는 뉴스거리도 못 될 지경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정작 IP를 판단 대상으로 하는 국제중재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영미법계에서는 특허분쟁에 대한 중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고, 대륙법계인 스위스 같은 나라는 국제사법 제177조(1)에서 IP 분쟁의 중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현실이다. 기술이전계약과 함께 이전되곤 하는 영업비밀에 대해서는 좀 더 흔히 국제중재 조항을 갖는 것 같지만, IP의 중심인 특허의 침해 여부 관련 국제중재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 사실이다. 물론, 중재는 당사자 사이에 분쟁을 중재로 해결하겠다는 중재 조항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특허침해를 문제 삼는 당사자 사이에 사전에 중재 조항을 갖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만으로 특허 관련 중재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특허의 속지주의 원칙과 국제중재

특허침해소송은 당사자 사이에 미리 계약을 해두고 있는 사이에서도 일어나지만, 아무런 계약 관계가 없는 회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에 더해, 특허는 예외 없이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 특허의 출원, 등록은 각국의 법률에 따르게 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특허로 보호받고 있는 발명이라고 하더라도, 국제 특허조약에 가입된 다른 나라,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자동으로 특허로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저작권의 경우, 베른조약에 가입한 나라들이 다른 체약국의 저작권을 당연히 보호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나라 특허를 미국에서도 보호받고 싶다면 미국에서 별도로 출원하고 등록받아야 한다. 특허를 무효로 만들고자 하는 경우에도 특허가 등록된 나라에서 그 나라의 법에 따라 무효심판을 해야 한다.

그러나 권리의 성격을 보면 특허야말로 가장 국제적인 IP다. 이미 세계의 시장이 하나로 돼가는 현실에서, 어떤 발명을 오로지 한 나라에서만 보호받는다는 것은 아예 보호받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주요 특허 중에서 세계 각국에 등록돼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 등록된 거의 동일한(출원 절차상 특허의 내용이 다소간 달라지는 경우는 있다) 특허를 묶어 ‘패밀리 특허’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일상용어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특허에 관한 분쟁은 국제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특허법원의 사건 중 40% 이상이 당사자의 일방 이상이 외국 기업이라는 통계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특허는 그 국제적인 성격에 걸맞게 국제적으로 라이선스가 이루어지곤 한다. 특허 라이선스에서 중재 조항을 계약에 넣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 종종 이뤄진다.

그러면 계약 관계가 없던 회사들 사이의 특허침해 분쟁도 사후적으로 중재 조항에 합의하고 국제중재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까? 특허침해는 기본적으로 계약 관계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특허침해 관계는 적어도 국제적인 기술 관련 기업들 사이에, 최소한 경고장을 주고받는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이 단계에서 당사자들은 얼마든지 중재 조항에 합의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럴듯한 기업들 사이에서 가능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국제중재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특허의 무효 절차가 속지주의를 따른다는 점이 방해되지는 않는다. 특허침해 소송은 종래부터 두 가지 쟁점, 피고의 제품이 특허의 권리 범위에 속하는지 여부와 특허가 무효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데 이미 여러 나라에서 침해소송 법원이 특허의 유효성을 판단해왔다. 침해소송 법원의 특허 무효 판단만으로 특허가 무효로 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특허 무효 절차가 별도로 있다는 점은 종래의 특허침해소송도 병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어색한 점이 아니다.


IP 국제중재의 장점과 점증 필요성

IP 분쟁을 국제중재로 해결하면 많은 장점이 있다. 첫째, 헌법상의 공개재판 원칙에 따라 법원의 변론은 공개될 수밖에 없지만, 중재는 비밀이 보장된다. 특히, 국제적인 평판을 중시하는 기업들이 소송에서 주장을 펼치다 보면 자기 기술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국제중재에 있어서는 이러한 단점이 없는 것이다. 

둘째, 중재인의 전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어느 판사에게 배정받을지 모르는 무작위 배정보다는 양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는 특허전문가(전직 특허 담당 판사 등)를 선택하여 중재판정부를 구성할 수 있고, 전문가 증인을 마음껏 활용함으로써 구체적 타당성을 기할 수 있다. 

셋째, 국제적인 특허분쟁은 수많은 나라의 법원에서 각각 이뤄지곤 했는데, 이러한 절차들을 한데 모아 일거에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넷째, 단심제에 따른 신속한 분쟁 해결을 할 수 있으며, 다섯째, 그에 따른 비용 절감도 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진행됐던 휴대전화 관련 특허분쟁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이 사건들을 국제중재로 해결했다면, 영업비밀 공개를 걱정할 것도 없이 전문 지식을 갖춘 중재인을 통해 일거에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장점은, 최근 들어 FRAND 이슈와 함께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필수 특허를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 조건으로(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 terms) 라이선스해야 한다는 FRAND 이슈는 최근 가장 자주 대두되는 특허분쟁의 내용이다.


IP 국제중재기관과 전망

그렇다면, 국제중재를 담당할 적당한 중재기관은 존재하는가. 물론, FRAND 이슈와 관련해 당사자 회사들의 합의에 따라 사적인 중재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기존에 확립된 중재기관도 존재한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는 국제중재 서비스를 이미 오래전부터 제공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WIPO의 IP 사건 중 특허 사건이 29% 정도라고 한다. WIPO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일본 특허청 내부 기관으로서 IACT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er in Tokyo)도 있다. IACT는 2018년 6월 29일 모의 중재를 열기도 했는데 그 사안 역시 FRAND 이슈와 관련된 것이었다. IACT의 중재인들은 미국, 영국 그리고 한·중·일의 전직 판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필자 역시 IACT의 중재인으로서 위 모의 중재에 참여한 바 있는데 모의 중재에 대한 관심과 참여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그러한 흐름에 우리나라 기업들만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기우에 그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