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백신과 치료제 개발 등 ‘백신 주권’ 강화 중요성이 부각됐다. 그러나 최근 엔데믹(e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 전환 분위기로 접어든 이후 국내 백신·치료제 개발사들이 잇달아 백기를 들고 있다. HK이노엔, 제넥신 등 백신 개발에 나섰던 기업들이 임상 시험을 중단했고, GC녹십자, 일양약품, 부광약품 등 제약사들도 일찍이 치료제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이들이 백신·치료제 개발을 포기하는 이유로는 임상 시험의 어려움과 수익성 악화 우려가 꼽힌다. 이미 많은 사람이 백신을 맞았고, 코로나19에 걸렸기 때문에 임상 시험 대상 자체가 적다는 것이다. 또 화이자, 모더나 등 기존 제약사가 사실상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수익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팬데믹 당시 온전히 글로벌 제약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만큼,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백신 주권 구축과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새 정부도 백신 주권 지원 의지를 표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4월 25일 국내 1호 코로나19 백신 개발사 SK바이오사이언스 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적어도 ‘돈이 없어서 개발을 못 한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정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번 칼럼에서 코로나19 백신에 활용된 생명공학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극복 사례를 소개하며, ‘생명과학 주권’과 의료 혁신을 위한 네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필립 A. 샤프 MIT 생물학 연구소 교수
필립 A.샤프 MIT 생물학 연구소 교수

코로나19 팬데믹은 공중보건과 재정 정책,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았다. 의약품 개발과 생산에 더 큰 공급망 회복 탄력성과 전략적 자율성이 요구되면서 ‘생명과학 주권’이라는 개념이 부상했다.

일례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가 2030년까지 최소 20개 이상의 새로운 바이오 치료제를 생산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 공공 투자은행의 재정 지원을 받는 마크롱 정부의 ‘프랑스 케어 이니셔티브(La French Care initiative)’는 프랑스의 생명공학 생태계를 지원하고 프랑스를 메신저 리보핵산(mRNA) 부문의 선두 국가로 만드는 게 목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영국 등 다른 국가도 자국 생명공학 부문 발전에 전념하고 있다.

이 국가들의 적극적인 관심은 환영할 만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소수의 백신과 치료제가 승인받기 위해서는 기존의 또는 새로운 화합물에 대한 수백 번의 임상 시험이 필요하며, 이들 중 많은 경우 실패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만큼 의료 혁신은 큰 비용이 들고, 이 혁신과 관련한 비용이나 리스크는 정책 입안자와 국민 모두에게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

리보핵산간섭(RNAi) 치료제 경우를 보자. RNAi 치료제는 암이나 당뇨 등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발현과 단백질 생성을 사전에 억제하는 기술이다. 이 치료법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지만, ‘과학적 가능성’ 단계에서 나아가 실제 환자들을 위해 적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50년대 DNA 구조와 기능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① 유전자 발현 과정을 뒷받침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꾸준히 이뤄졌다. 이런 와중에 스탠퍼드 대의 앤드루 파이어(Andrew Fire) 교수와 매사추세츠대의 크레이그 멜로(Craig Mello) 교수는 1988년 RNAi 현상을 발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파이어와 멜로의 발견으로 ‘짧은 간섭 RNA(siRNA)’가 새로운 치료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흥분한 제약 회사들은 이 새로운 연구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곧 RNAi 기술을 치료제로 바꾸는 데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siRNA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인체 내 적절한 위치, 즉 질병 유전자가 발현된 장기까지 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였다. 

난관에 부딪힌 많은 제약 회사와 연구원들이 이 분야에서 눈을 돌렸고, 2010년 초반까지 대부분 대형 제약 회사들이 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접었다. 앨나일람(Alnylam)을 비롯한 몇몇 회사만이 연구를 지속했고, 결국 LNP(지질나노입자)를 운반체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은 RNAi 치료제는 네 종이며, 코로나19 mRNA 백신에 LNP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앨나일람이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20여 년의 시간과 약 75억달러(약 9조5700억원)가 소요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줄리앙 패트리스 앨나일람 제약회사 국제 시장 정책 매니저
줄리앙 패트리스 앨나일람 제약회사 국제 시장 정책 매니저

RNAi 사례는 ‘생명과학 주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 (생명공학 분야에서) 성공은 과학적 우수성과 대중의 지지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② 보스턴은 1000개 이상의 생명공학 관련 기업이 있는 세계적인 생명공학 중심지로 꼽힌다. 그러나 이런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는 1970년대 ‘바이오젠’이 설립된 이후 50년이 걸렸다.

보스턴 생명공학 생태계는 다양한 힘이 상호작용한 덕분에 성장했다.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 있는 세계적 수준의 생물의학 전문 지식이 확실히 도움이 됐지만, 엔지니어링, 비즈니스, 재무, 컴퓨터공학, 데이터과학 같은 여러 학문의 기술도 그 바탕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연구 병원들과 가깝다는 점도 주효했다. 과학계와 의료계를 하나로 모은 것은 임상 시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보스턴과 뉴욕의 초기 벤처캐피털과 투자자들이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둘째 교훈은 ‘주권’에 관한 것이다. 이 개념은 민족주의적 의미로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 생명과학 생태계가 성공하려면 국제적으로 개방돼야 한다. 그래야 전 세계의 과학적 노하우, 재능, 자본을 활용할 수 있다. 사노피, 노바티스, 입센, 다케다 등 유럽과 일본의 대형 제약사들이 보스턴에 투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즉, 국내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정부는 해외에서 인적 자본과 재정적 자본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일례로 영국은 대규모 생물의학 데이터베이스이자 연구 자원인 ③ ‘바이오 뱅크’를 통해 얻은 국민건강서비스(NHS) 데이터를 활용해 글로벌 기업 및 연구진과 파트너십을 구축, 궁극적으로 신약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셋째, 의료 혁신을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 부문 모두에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재정 안정성과 지속적인 투자 사이클을 보장하기 위해, (의료) 혁신에 보상하도록 시장과 정책 인센티브를 조정해야 한다. 성장 기회가 제한되고, 시장 접근성이 떨어지면 연구 역량이나 임상 시험에 대한 투자 동기가 저해된다. 새로운 혁신이 적절하고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평가받는 시장은 투자와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사고방식의 변화도 요구된다. 의사 결정자들은 생명과학 혁신을 ‘비용’이 아닌 ‘전략적 투자’로 봐야 한다. 

이 밖에 많은 혁신적 해결책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채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생명공학 산업계와 정책 입안자 그리고 대중 간의 더 많은 대화와 새로운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유전자 발현(Gene expression)은 DNA를 구성하는 유전 정보, 즉 유전자에 의해 생물을 구성하는 다양한 단백질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유전자 발현은 같은 유전자라 하더라도 밤낮 길이, 운동 여부, 중금속 오염, 스트레스 등 다양한 환경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2015년 3월 27일부터 2016년 3월 1일까지 340일간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머문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인 스콧 켈리가 지구로 귀환한 직후 그와 유전자가 같은 쌍둥이 형제와 비교한 결과, 스콧 켈리의 유전자 발현이 우주 비행 전과 7% 차이 난 것으로 확인됐다. 산소 부족에 따른 스트레스, 우주방사선에 따른 염증 증가, 유전자 발현에 관련된 영양 환경 변화 등이 원인으로 꼽혔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는 글로벌 제약사 20여 곳을 중심으로 1000개 이상 바이오 기업이 입주해 있는 세계 최대 바이오 산업단지가 있다. 하버드대, MIT 등 유수의 대학과 연구소, 대형 병원과 함께 바이오젠, 머크, 모더나, 화이자, 노바티스 등 글로벌 제약사가 밀집해 있다. 7만4000개 이상 일자리와 2조달러(약 2552조원)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사추세츠주 바이오협회(MassBio)의 ‘2020 제약·바이오산업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미 국립보건원(NIH)이 매사추세츠주에 투입한 연구개발비는 2019년 한 해에만 30억달러(약 3조8200억원)에 달했다.

영국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2억5000만달러(약 3190억원) 예산을 투입해 성인 약 50만 명의 DNA 정보와 진료기록·식습관·음주량 등 2500여 가지 개인정보를 담은 ‘바이오뱅크’를 구축했다. 영국 정부는 지난 2017년 7월부터 대학과 제약사 등의 관련 연구자들이 UK 바이오뱅크 빅데이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도 2012년 개관한 국립보건연구원 국립중앙인체자원은행을 중심으로,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필립 A. 샤프, 줄리앙 패트리스 / 정리 : 이선목 기자, 김보영 인턴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