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임무 완수를 선포하며 권력을 쥐었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결국 불명예 퇴진하며 실패한 지도자로 남게 됐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7월 7일 “보수당 당수 자리에서 사임한다”며 “올가을 새 당수가 선출되면 총리 자리에서도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코로나19에 따른 봉쇄 기간에 총리실 직원들이 술판을 벌인 ‘파티 게이트’ 사건과 측근의 성 비위를 알고도 주요 당직에 앉혔다는 비판을 모면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거짓말을 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는 수차례 말을 바꾸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논란은 증폭됐고 민심은 돌아섰다. 보리스 존슨 총리 집권 시기, 영국의 경제 상황도 악화됐다. 코로나19로 경제가 타격을 입은 데다 브렉시트로 유럽연합(EU)에서 영국으로 유입되는 노동자가 줄면서 일손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많은 노조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물가 상승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영국의 파운드화가 약세를 나타내면서 수입 물가가 올라 영국 내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올가을 영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10%대를 넘어 절정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세계적인 통화·금융 전문가인 필자는 “오늘날 영국은 과거 파운드화의 위기 그리고 영국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며 “영란은행(BOE·영국 중앙은행)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작다”고 전망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7월 7일 사임 연설을 하고 있다.사진 블룸버그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7월 7일 사임 연설을 하고 있다.사진 블룸버그
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대버클리캠퍼스 교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 IMF 수석정책 자문위원
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대버클리캠퍼스 교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 IMF 수석정책 자문위원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영국 국민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영국 파운드화 환율 불안감도 키웠다.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지난해 봄 정점을 찍은 뒤, 10%가량 절하됐다. ‘파운드화가 국제 시장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준비자산인 특별인출권(SDR) 편입 통화(달러화․유로화․파운드화․엔화․위안화) 중 파운드화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화폐는 엔화뿐이다. 

투자자들은 영국 파운드화를 안정적인 선진국 화폐가 아닌 문제 있는 신흥국 화폐처럼 평가하고 있다. 존슨 총리가 7월 7일(현지시각) 보수당 당수직에서 사임하면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졌고, 파운드화 가치는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파운드화에 대한 이 같은 견해는 과장됐다고 치부할 수 있다. 달러 대비 가치가 절하된 화폐는 파운드화 외에도 많다. ‘10% 가치 절하’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하지만 파운드화 가치 하락이 아직 끝났다고 할 수 없고, 파운드화 가치 하락은 과거 영국 경제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지표가 되어줬다. 1990년대 파운드화 위기는 네 차례 있었고, 이때 영국 경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먼저 영국 내 실업률이 21%를 돌파하던 1931년 당시, 파운드화가 평가 절하됐다. 파운드화 절하가 영국의 저조한 생산성을 반영한 건지, 세계적 불황의 일부분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사실 이는 둘 다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은 엄청난 수준의 실업률, 만성적인 재정 적자, 인버고든 폭동(해군 파업) 등으로 파운드화가 절하됐지만, 영란은행은 파운드화 절상을 위한 금리 인상을 시도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화폐 투기꾼들은 이를 알고 있었고, 파운드화를 금본위제에서 몰아내기 위해 덤벼들었다. 

두 번째 파운드화 위기는 1949년에 찾아왔다. 이 위기는 당시 국제 통화로서 파운드화의 위상을 되찾으려 한 영국 정부를 당황케 했다. 영국은 금본위제 포기 이후 파운드화를 미국과 무역에 사용할 수 없었고, ①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기축통화가 된 달러 부족에 시달렸다. 영란은행은 한 번 파운드화 절하 가능성이 제기되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달러 보유고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세 번째 파운드화 위기는 1967년에 있었다. 1967년 6월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으로 수에즈 운하가 막히고 부두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는 등 복합적인 문제가 파운드화 절하로 이어진 셈이다. 당시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는 파운드화 절하로 수입품 가격이 높아지면, 지지자들의 생활 수준이 악화할 것이라 걱정했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윌슨 총리는 1967년 11월 18일 금융 대책으로 파운드화 14% 절하를 발표했다. 당시에도 영국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성 둔화였다. 이는 경쟁력 없는 수출과 무역 적자, 높은 실업률로 이어졌다. 노동당을 이끌었던 월슨 총리는 자국 내 수요와 성장을 자극하기 위해 금리 인하, 자동차 구매를 위한 대출 규제 완화를 시행했지만 이는 무역수지 악화, 영란은행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그는 “당신의 주머니 속의 파운드화는 아직 평가 절하되지 않았다”고 영국인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유권자는 그의 가식을 꿰뚫어 봤고, 노동당은 잇따라 선거에 패배했다.

물론 당시 파운드화 절하를 막기 위해, 영란은행이 금리를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높은 금리는 더 높은 실업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란은행과 재무부는 항복했고, 조지 소로스의 압박과 함께 파운드화 가치는 더 절하됐다.

네 번째는 1992년 유럽통화제도(EMS) 중심 기구인 ② ‘유럽환율조정장치(ERM)’에서 영국이 탈퇴했을 때다. 이때도 영국의 낮은 생산성이 배경이었다. 영국의 시간당 생산성은 1970년대 초 독일의 96% 정도였으나, 1992년에는 87%까지 떨어졌다.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에 맞춰 가격을 정해야 했는데, 생산성 하락에 파운드화의 경쟁력 하락도 지속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이 동독과 서독 통일 이후 통화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시행하면서, 영국을 포함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고정 환율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의 경제 상황과 파운드화 역사는 현재와 앞으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국은 지금도 낮은 생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낮은 생산성 문제는 2016년 이후 특히 심해졌다. 노사 관계는 까다로운 데다 인프라는 낡았고, 투자 규모가 크지 않고, 노동자는 부족하다. 브렉시트가 초래한 갈등과 비효율성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상품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상품 가격을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국가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거나 파운드화를 절상시켜야 한다. 하지만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하락하는 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영국이 큰 타격을 받은 데다 오랜 기간 허리를 졸라맸던 노조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파운드화 가치는 계속해서 절하될 수밖에 없다. 

영란은행은 경기 침체를 각오하고서라도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 파운드화를 절상해 높은 인플레이션을 막는 방법이다. 하지만 영국의 과거 100년 행적을 들여다보면, 영란은행이 금리 인상을 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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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1944년 7월 미국의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새로운 국제 통화 구축을 위해 체결한 협정에 따라 발족한 국제 통화 체제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가 붕괴하고 많은 나라가 무역 규제 확대와 환율 불안정을 겪었다. 이에 금본위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으나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논의가 지연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될 때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선진국들이 국제 금융 시스템을 논의하기 시작해 찾은 해결책이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인 브레턴우즈 체제다. 

금본위제를 시행할 당시에는 금 1온스당 4.25파운드로 고정돼 있었으나, 브레턴우즈 체제로 금 1온스가 35달러로 고정되면서, 세계 각국의 통화 가치는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고정환율제)됐다. 이에 국제 무역에서 파운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미국 달러의 시대가 열렸다. 이후 달러는 독보적인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다.

유럽통화제도(EMS)가 1979년 3월 발족되면서 시작된 환율 조정 장치. 환율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EU 회원국 간 중심 환율을 정한 뒤 각국의 환율 변동 폭을 상하 2.25% 이내에서만 허용했다. 영국과 이탈리아 등 몇몇 나라만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 상하 6% 변동 폭을 허용했다. 기준 변동 폭을 벗어날 정도로 환율이 요동치면 회원국 중앙은행들은 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조절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