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품군 내에서 얼마나 많은, 어떤 특성의 브랜드를 시장에 내놓는가. 우리는 이를 가리켜 ‘브랜드 포트폴리오’ 전략이라고 한다. 시장을 여러 개의 세분화된 시장으로 나누고 각 시장 특성에 맞도록 개별 브랜드를 개발해 대응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전체로 보면 하나의 시장이지만 타깃층 특성별로 하위 시장을 여러 개로 나눠서 대응한다.
따라서 돈이 많이 드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담배 시장에 브랜드 수십 개로 대응하는 KT&G 사례를 생각하면 되겠다. 기업이 기민한 포트폴리오 전략을 수행할 때, 개별 브랜드는 각각의 전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기획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염가진입형(low-end entry-level)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보다 고가의 자사 브랜드로 구매를 전환하려는 역할, 즉 미끼 역할을 한다. 5시리즈의 매출 증대를 숨은 목적으로 도입한 BMW의 3시리즈가 여기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브랜드를 도입해, 소비자의 알아보고 싶은 마음과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다. 소비자의 정보 추구 행동을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트래픽 빌딩(traffic building) 브랜드’라고도 한다.
또 하나는 ‘최고급형(high-end prestige) 브랜드’다. 기업이 보유한 전체 포트폴리오 이미지의 제고 역할을 맡은 브랜드를 말한다. 이 브랜드 자체는 굳이 많이 팔리지 않아도 된다. 이미지를 구축해서 후광효과(halo effect)를 만들어내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맥락에서 ‘이미지 빌딩(image building) 브랜드’가 된다.
현대자동차의 ‘N’
자동차 회사는 독특한 형태의 최고급형 브랜드를 도입하기도 한다. 단순히 가격 측면의 프리미엄이 아니라 성능적인 프리미엄을 강조하기 위해 서브 브랜드를 도입하는 것이다. 최첨단 제품 브랜드를 통해 기술력을 과시하는 게 목적이다. 이 브랜드의 특징은 보통 특정 모델의 최고 성능 버전에 약자를 붙이는 식으로 일반화돼 있다. 캐딜락의 ‘V’, 폴크스바겐의 ‘R’, 렉서스의 ‘F’, 아우디의 ‘S’와 ‘RS’가 유명하다. 이들 모두 별도 사업부나 자회사가 아닌 서브 브랜드로만 운용하고 있다. 프로축구 K리그의 명문 구단 전북현대모터스 유니폼에 커다랗게 알파벳 ‘N’이 붙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N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수도 있다. N은 2015년 발표된 현대차의 고성능 서브 브랜드다. 많은 팬을 거느린 이 명문 구단 유니폼에 잘 팔리는 자동차 브랜드를 붙이는 것이 세일즈 측면에서는 더 나았을 수도 있다.
현대차는 고성능 이미지를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확보하고 싶어 했다. N은 현대차의 고성능 차량을 뜻하고, N 포트폴리오의 정점에는 최근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모터스포츠가 있다. 모터스포츠카를 지향하는 현대차 제품군이 N인 셈이다. N은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와 N시리즈 차량의 성능시험 장소인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독일의 레이싱 서킷)의 머리글자에서 따 왔다. 현대차에는 그냥 N도 있고 N 라인도 있다. N은 제품군에 붙는 브랜드이자 최고 성능을 가진 차량에 붙이는 별도 브랜드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는 2018년 현대 N 페스티벌, 2021년 현대 N 데이(Day), 2022년 현대 N e-페스티벌 글로벌 리그 등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브랜딩을 펼쳤다. 이런 노력은 마침내 보상받기에 이르렀다.
현대차의 2022년, N 비전 74
7월 15일, 현대 N 데이에서는 수소전지 기반 모터스포츠 지향 콘셉트카 ‘N 비전 74’가 소개됐다. 유튜브로 공개한 영상의 조회 수는 폭발적이었다. 공식 영상 댓글은 외국인의 찬사로 넘쳐났다. 각국 자동차 전문가도 N 비전 74를 집중 조명했다. 오히려 국내 반응이 상대적으로 미지근할 정도였다. 현대차가, 아니 우리나라 브랜드가 이 정도의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낸 것은 전대미문이다.
물론 공개된 모델은 콘셉트카라서 현재 디자인 그대로 양산까지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는 나올 것이다. 사람들이 이 콘셉트카에 매료된 것은 1985년에 나온 영화 ‘빽 투 더 퓨쳐’에 나왔던 자동차 때문이었다. 영화에 나왔던 타임머신 기능을 하는 자동차가 DMC의 들로리안(Delorean)이다. N 비전 74가 그 차를 떠올리게 했고,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열광했다. 뉴트로(newtro)는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기보다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N 비전 74 콘셉트카는 뉴트로 디자인의 정석이다.
N 비전 74의 디자인이 빽 투 더 퓨쳐에 등장한 들로리안을 닮은 이유가 있다. N 비전 74의 디자인은 1974년 현대차 콘셉트카였던 포니 쿠페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국산 자동차 포니는 1975년에 세단과 해치백으로 출시됐지만 원래 포니 콘셉트카는 쿠페였다. 포니 쿠페는 카로체리아 이탈디자인의 그 유명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했다. 그는 사장된 콘셉트카 디자인을 들로리안에 적용했고 ‘영감을 받았다’라는 표현으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N 비전 74의 ‘74’는 포니 쿠페 콘셉트카를 만들었던 1974년을 기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N 비전 74라는 브랜드가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 N 비전 74는 수소 하이브리드 고성능 차다. 배터리를 교체하지 않는 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전기차보다 훨씬 모터스포츠에 가까운 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은 현대차의 기술력에도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1974년에 이런 대담한 디자인을 준비했던 현대차의 역사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는 작년 미국 시장에서 혼다를 제치고 판매 5위에 올랐다. 미국 수출 35년 만에 이룩한 위업이다. 1986년 1월 현대차는 포니 액셀로 미국 수출을 시작했다. 1년 만에 판매량이 16만 대를 넘을 정도로 잘 팔렸으나 이후 잦은 고장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고착된 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집행한 포니 액셀 광고에는 서글픈 내용도 있다. 한 사람이 자동차를 한 대 몰고 와서 세운다. 그 사람이 뒤로 뛰어가서 또 한 대를 몰고 와서 아까 차 뒤에 세운다. 그리고 앞에 있는 차를 운전해서 간다. 그리고 다시 뛰어와서 뒤에 있던 차를 몰고 간다. 이런 장면이 계속 보이다가 마침내 광고 문구가 나온다. “한 대 가격으로 두 대를, 현대.”
그 서글픈 광고를 직접 보고 젊은 시절 열패감을 느꼈던 필자는 N 비전 74에 열광하면서 현대차 역사까지 재조명하는 외국의 자동차 전문가들을 보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필자는 2022년 7월에, 세월을 흘려보내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을 쌓아 온 힘을 다해 역사로 만든 헤리티지 브랜드를 보았다. 그것도 우리나라 브랜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