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서 농어회를 유명하게 한 장한(張翰). 사진 바이두
고대 중국에서 농어회를 유명하게 한 장한(張翰). 사진 바이두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가을의 이미지는 수확과 단풍 그리고 ‘등화가친(燈火可親)’ 따위다. 다른 한편으로 가을이 깊어지면 초목이 시들고 서리가 내려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는 추상(秋霜)같이 형벌을 관장하는 부서에 ‘추관(秋官)’이란 이름을 붙였다.

‘주례(周禮)’는 주나라의 관직 제도에 관한 기록이다. 그래서 ‘주관(周官)’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모든 관직을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여섯으로 분류했다. 이 중 ‘동관(冬官)’은 실전돼 ‘고공기(考工記)’가 대신 들어가 있다. 이 제도가 후일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부(六部)로 개편되고 한반도에 들어와 ‘육조(六曹)’로 정착됐다. 또한 ‘주례’에 의거, 예조(禮曹)를 ‘춘관(春官)’, 형조(刑曹)를 ‘추관’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대 중국의 사형 집행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반드시 가을에 실시됐다. 초목을 ‘숙살(肅殺)’하는 계절의 이미지에 어울리고 담당하는 부서의 명칭에도 걸맞다. 이를 ‘추결(秋決)’이라 칭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식도락가들에게 가을은 무엇보다 ‘전어’의 계절이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대로 이 계절의 대표 어종은 바로 유달리 맛이 고소한 이 전어다. 구워도 좋지만 역시 회로 먹어야 제맛이다. 그래서 필자처럼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전어회를 맛보기 위해 가을이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우리의 가을에 전어회가 있다면 옛날 중국의 가을에는 농어회가 있었다. 젊은 시절 고향 사천(四川)을 떠난 이백(李白)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갈 때 호북(湖北)의 형문이란 곳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강남(江南)으로 떠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가을날 형문을 내려가며(秋下荊門)’라는 제목이다.

“서리 내린 형문 강가 나무는 휑하고, 베돛은 탈 없이 가을바람 걸었다. 이번 길이 농어회 때문은 아닐지니, 나 홀로 이름난 산 좋아해 섬중에 들어가려네(霜落荊門江樹空, 布帆無恙掛秋風. 此行不爲鱸魚鱠, 自愛名山入剡中).”

농어는 가을철 강남의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는 곳에서 많이 잡히는 어종으로 예부터 유명했다. 이백도 익히 잘 알고 있어 이런 시를 지었다. 이 농어회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은 서진(西晉)의 명사 장한(張翰)이다. 도성 낙양(洛陽)에서 벼슬살이하던 그는 어느 날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 오중(吳中)이 그리워졌다. 특히 순채(蓴菜)국과 농어회 생각이 간절해 바로 사표를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그가 섬기던 주군이 ‘팔왕의 난(八王之亂)’에 휘말려 피살됐다. 그의 일화에서 “죽은 뒤의 이름보다 지금의 한잔 술이 좋다”는 말도 유명하다. 이를 두고 이백은 ‘행로난(行路難)’ 3수의 마지막에서 다음같이 칭송했다. “그대 보지 못했나, 오중의 장한이 달관한 사람이라 일컬어져, 가을바람에 홀연 강동 길을 떠올렸으니. 그저 생전의 한잔 술이나 즐길 일이지, 어찌 죽은 뒤 천년의 이름을 구하겠는가?(君不見吳中張翰稱達生, 秋風忽憶江東行. 且樂生前一杯酒, 何須身後千載名).”

회의 역사는 유구하다. ‘시경’에는 “여러 벗에게 술 권하며, 자라 찌고 잉어 회치다(飲御諸友, 炰鱉膾鯉)”라는 구절이 보인다. ‘논어’에도 공자가 “회는 가늘게 썬 것을 좋아했다(膾不厭細)”고 기록돼 있다. 조조(曹操)의 아들로 당(唐) 이전 최고 시인으로 꼽히는 조식(曹植)은 “잉어 회치고 새우 국 끓이며, 자라 찌고 곰발 굽다(膾鯉臇胎鰕, 炮鱉炙熊蹯)”라고 읊었다. 동진(東晉)의 간보(干寶)가 지은 지괴(志怪·괴이한 일을 적음) 소설 ‘수신기(搜神記)’에는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배 위에서 회를 먹고 남은 것을 강에 던졌더니 모두 물고기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膾’에 대해 ‘고기를 잘게 썰다(細切肉也)’라고만 애매하게 설명돼 있다. 역대의 시문들에 등장하는 회에 대한 여러 주석도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어 모호하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소와 양, 어류의 날고기를 가늘게 썬 것이 회다(牛與羊魚之腥, 聶而切之爲膾)”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서(漢書)’의 ‘동방삭전(東方朔傳)’에도 “날고기를 회라 하고, 말린 고기를 포라 한다(生肉爲膾, 乾肉爲脯)”는 구절이 있다. 또 ‘후한서(後漢書)’의 ‘방술열전(方術列傳)’에는 명의 화타(華佗)가 광릉태수(廣陵太守) 진등(陳登)이 ‘물고기 회(生魚膾)’를 많이 먹어 병에 걸렸다고 진단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 보아 회는 날고기를 가늘게 썬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에는 소와 양 등의 날고기도 회로 먹었으나 후대에는 어류가 주종이 됐다.

이처럼 날고기 회는 구운 고기와 함께 예부터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회자(膾炙)’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다. ‘예기’와 ‘맹자(孟子)’에 처음 보인다. 후일 ‘인구에 회자되다(膾炙人口)’라는 말도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오랫동안 성행하던 음식문화가 나중에 거의 단절돼 버렸다. 소식(蘇軾)의 시에 “더욱이 농어가 있어 회로 썰 만하다(更有鱸魚堪切膾)”는 등의 예가 보여 중세까지도 대중이 즐겼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뒤 점점 자취를 감춰 극히 일부 지역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대 중국에서는 회를 ‘성위폔(生魚片)’이라고 한다. 일본의 ‘사시미(刺身)’와 한국의 회가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이런 말도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고유의 음식 문화가 세월이 지나 어느덧 외래문화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한국이나 일본이 회 문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음식 부문에 등재를 신청한다면 중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그동안의 여러 행태로 볼 때 회가 예부터 자국의 고유문화이므로 다른 나라가 등재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 2005년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중국은 ‘단오’가 중국 명절임을 이유로 방해했다. 그러나 강릉의 단오제는 ‘단오’라는 절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라는 문화 양식에 그 의미가 있다. 그 뒤 중국은 끈질기게 ‘단오’를 내세워 2009년 결국 등재를 성사시켰다. 2011년에는 ‘아리랑’을 중국의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자국 경내에 거주하는 조선족 문화이므로 중국 문화의 일부라는 논리다. 이듬해에 우리의 ‘아리랑’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조짐이 보이자 이에 대응한 것이다. 최근에는 ‘한복’도 조선족 문화이므로 중국 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오래전부터 계획적으로 진행돼 온 ‘동북공정’이 향후 어떻게 확대돼 갈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제 역사라고 주장하더니 최근에는 한국 역사 연표에서 아예 이를 빼 버렸다.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도 오늘날의 조선족 자치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중국 시인이라고 생떼를 쓴다.

 

한글의 원리와 사용법을 해설한 국보 ‘훈민정음해례본’.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 문화재청
한글의 원리와 사용법을 해설한 국보 ‘훈민정음해례본’.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 문화재청

이로 미루어보아 ‘한글’도 조선족이 사용하고 있으므로 자국 문자 중 하나라고 주장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 물론 ‘훈민정음해례본’이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앞으로 어떤 기상천외의 궤변이 등장할지 헤아리기 어렵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과는 반대로 고유문화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물리친 적이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닌 자장면(炸醬麵), 우동(うどん), 짬뽕(ちゃんぽん)은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왔지만 어느덧 우리에게 친숙한 대표적 대중음식이 됐다. 다른 분야도 이처럼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수용해야 한다. 예컨대 한글 사랑이 넘치고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 지나친 나머지 한자(漢字)를 증오하고 배척할 것까지는 없다. 한자가 중국만의 것이라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벌써 2000년이나 우리가 공유해 온 문자이기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외래문화도 슬기롭게 활용하는 전향적인 마음가짐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전 서울신문 기자,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