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000만원 이하 빚을 10년 이상 안 갚은 장기소액연체자의 빚을 대폭 감면해주는 제도를 상시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정부가 1000만원 이하 빚을 10년 이상 안 갚은 장기소액연체자의 빚을 대폭 감면해주는 제도를 상시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2018년 1월, 문재인 정부는 대대적인 ‘경제사면’을 실시했다. 1000만원 이하의 원금을 10년 이상 갚지 못한 장기소액연체자 25만2000명과 연대보증인 21만명이 빚진 3조2000억원(1인당 평균 693만원) 전액을 탕감해준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빚 탕감 정책이 2019년 2월 28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용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종구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목표는 (채권 소각을) 일회성으로, 내년까지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약속을 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2018년 12월 21일, 정부는 또다시 ‘빚 탕감’ 카드를 꺼냈다. 이날 금융위원회는 ‘서민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을 통해 “내년 상반기 중 소액채무자 특별감면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장기소액연체자 지원대책을 제도화, 상시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장기소득연체자는 총소득 중에서 최저생계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으로 3년간 성실하게 갚을 경우, 남은 빚을 모두 면제받을 수 있다.

또한 정부는 ‘상시 채무조정 지원제도’라는 새로운 개인워크아웃 제도도 마련했다. 지금까지는 연체가 시작된 지 30일 이상은 돼야 신용회복위원회가 운영하는 개인워크아웃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연체가 시작되기 전이나 시작된 지 30일이 안 된 채무자도 실업·폐업·질병 등으로 돈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되면 채무조정을 받을 수 있다. 원금을 깎아주는 건 아니지만 최대 1년간 상환을 유예받거나 이자 감면을 받을 수 있다. 개인워크아웃 제도의 원금 감면폭도 확대했다. 현재 30~60%인 감면율을 20~70%로 늘린 것이다. 금융위는 “더 갚을 수 있는 사람은 더 갚고, 어려운 사람은 덜 갚도록 개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 같은 빚 탕감 정책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상식을 무너뜨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려운 사람은 돈을 빌린 뒤 갚지 않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꾸준히 원금을 갚아나가는 성실 채무자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득 수준 등을 고려해 이자 정도는 면제해 줄 수 있지만, 원금 자체를 탕감해주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며 “소액장기채무자 기준을 1000만원으로 정해놨는데, 이 기준 자체도 형평성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900만원 빌린 사람은 탕감 대상자인데, 1100만원 빌린 사람은 고스란히 갚아야 한다는 것은 채무자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빚 탕감 정책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실제 사례로 나타난 바 있다. 2003년 ‘카드 사태’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카드빚을 갚지 못한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는데, 정부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개인 채무를 조정해주는 통합도산법, 채무상환기간을 연장해주는 신용회복지원협약 개정안 등을 차례로 마련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의 ‘연체와 개인회생 신청 급증: 가계부실 심화인가, 도덕적 해이 확산인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채무자들 사이에선 일단 빚을 갚지 않고 기다리면 더 유리한 대책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형성됐다. 빚을 갚지 않고 최대한 버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용카드사의 연체율은 급등했다. 2002년 말 6.6%였던 신용카드사의 연체채권 비율이 2003년 말 14.1%까지 뛰어오른 것이다.


도덕적 해이 낳고 형평성 해치는 빚 탕감

개인파산이 증가하는 주요 원인으로 채무자 구제제도를 지목하는 연구 결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데이비드 그로스 전 시카고대 경영학과 교수는 1995년 개설된 계좌 중 1995년부터 1997년 사이 장기간 원금과 이자 상환을 연체한 채무자를 조사했다. 채무자들은 실제로 갚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무자 구제제도만을 믿고 빚을 늘렸다. 즉 제도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자신의 편익을 늘리려 했다는 것이다.

채무자 구제제도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최근 사례만 살펴봐도 빚 탕감 정책은 2013년 국민행복기금(채무불이행자 신용회복을 돕는 기금) 설립, 2015년 안심전환대출(단기·변동금리 대출을 장기·고정금리 대출로 바꿔주는 상품) 도입, 2017년 장기소액연체자 100% 탕감 등 2년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며 “담당 공무원들도 이 같은 정책이 반복될 경우 도덕적 해이, 형평성 논란 등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정책이 계속되는 이유는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접근하는 이들이 이 정책을 계속 사용하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저소득층이 빚 탕감 정책을 통해 완전히 회생했다면 이 같은 정책은 규모가 점점 축소돼야 한다”며 “채무자의 상환능력, 상환노력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빚만 없애주다 보니 저소득층이 빚의 고리에 계속 빠지고, 그래서 이 같은 정책이 계속 나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국가들은 채무자 구제제도의 남용을 막기 위한 여러 장치를 도입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파산신청 이전에 신용상담을 반드시 거치도록 의무화하고, 신용과 채무관리에 대한 교육을 받도록 한다. 채무자들은 신용상담을 통해 개인의 재무상태를 파악하고 신용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독일은 개인이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려면 재판 이외의 방법을 통해 채무 변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졌을 경우에도 바로 파산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의 중재하에 최장 6년간 채무재조정을 시도해야 한다.


plus point

기업 팔 비틀어 서민금융 재원 마련

정부는 이번 ‘서민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을 통해 저신용자(7~10등급)를 위한 연 10% 후반대의 전용 대출상품도 마련했다. 저신용자들이 이 상품으로 갈아타면 대부업체(연 24%)를 이용할 때보다 이자부담을 확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이 서민금융정책 사업에 필요한 돈을 정부가 아닌 민간 금융기업이 댄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는 기존 저축은행과 상호금융만 연간 1000억원가량 출연하던 것을 내년부터는 은행 포함 전 금융업권이 상시 출연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출연금은 금융사 가계신용대출 규모에 비례해 부과하기로 했다. 가계신용대출 규모가 큰 금융기업의 부담이 커진다는 뜻이다. 출연금을 강제하는 정부의 논리는 ‘금융기업이 채무불이행자 발생에 따른 사회적 비용 등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면밀히 따져 돈을 빌려줬어야 했는데, 금융기업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으니 이들을 구제할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정부는 금융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물린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론 국민의 부담이라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경제연구원 관계자는 “국민이 맡긴 예금엔 낮은 금리, 대출엔 높은 금리를 매겨 금융기관이 돈을 벌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금융기업이 정부에 주는 돈은 모두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며 “정부는 채무자 구제제도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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