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 노동자가 도이체방크 지점 간판의 전선을 수리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지난달 27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 노동자가 도이체방크 지점 간판의 전선을 수리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리먼브러더스의 유령이 도이체방크에 나타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4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독일 최대 은행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도이체방크가 미국 법무부로부터 140억달러(약 15조900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고 파산 가능성이 거론될 때였다.

도이체방크가 위기에 처한 건 예상보다 높은 액수의 벌금을 부과받았거나 파생상품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투자은행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익성에만 집중하다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이 도이체방크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 주주·직원과 소통도 부족했다.


140년 역사의 독일 대표 은행

도이체방크는 독일에 대형은행이 필요하다고 느낀 민간 금융업자들이 1870년 프로이센 빌헬름 1세에게 허가받아 그해 4월 9일 베를린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아직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어서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라는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국력 성장과 함께 도이체방크도 커나갔다. 설립 1년 후인 1871년에 브레멘, 1872년엔 함부르크에 지점을 열었다. 독일 밖엔 1872년 중국 상하이, 일본 요코하마, 1873년 영국 런던에 지점을 냈다. 19세기 말 독일의 수많은 은행을 흡수했고, 20세기에도 계속 은행을 합병해 덩치를 키웠다. 1929년엔 오랜 역사를 지닌 경쟁사 디스콘토은행을 합병했는데, 당시까지 독일 금융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합병이었다. 이 합병은 세계 대공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이체방크는 산업과 정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도이체방크가 탄생한 덕에 독일의 무역업자들은 영국과 프랑스 금융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교역할 수 있었다. 철강 회사 크루프에 투자했고, 화학 회사 바이엘이 베를린 주식시장에 상장할 수 있게 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다임러와 벤츠 합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이체방크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유럽의 중소 은행을 통합했다. 게슈타포에 금융 지원을 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했다. 도이체방크는 1999년, 아우슈비츠와 연관돼 있었다고 공식 인정하고, 다른 독일 회사들과 함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52억달러 규모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동독의 도이체방크는 폐쇄되거나 몰수당했고, 서독에선 ‘카르텔 해체’ 원칙에 따라 10개의 독립된 은행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자 서독의 경제력을 강화할 필요가 생겼고, 1957년 도이체방크가 완전히 통합돼 하나가 됐다. 1959년엔 소액 개인 대출을 도입하고 소매금융을 시작했다. 해외 점포망도 확장했다.

도이체방크가 투자은행으로 변신해 지금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건 1989년부터다. 이 해 영국 투자은행 모건 그렌펠을 인수해 M&A(인수합병) 및 자산관리 역량을 확보했다. 이후 ‘도이체 모건 그렌펠(DMG)을 중심으로 영국에 금융지주회사를 세웠다. 1992년에는 북미 시장에서 기업금융, 증권·파생상품 거래, 외환, 자산관리 부문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현재 70여개국에 10만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이름처럼 독일을 상징하는 은행이다.


실패 원인 1 |
주택담보대출에서 고수익 좇다가 역풍 맞아

도이체방크는 다른 은행처럼 2001년 9·11테러 이후 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되자 수익성에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미국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시장이다.

2004년 도이체방크는 미국 다가구 공동주택 대출 시장에서 앞서가던 버크셔 모기지를 인수했다. 2005년엔 CMBS(상업용 부동산 저당증권)와 부동산 CDO(부채 담보부 증권) 발행 부문에서 3위 안에 들었다. 2006년 MBS(주택저당증권)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 신탁회사와 주거용 모기지를 취급하는 ‘모기지 IT’를 인수했다. 모두 2007년에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이 된 파생상품들이다.

이 때문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 도이체방크의 순매출은 2007년보다 171억200만유로(약 21조3000억원) 감소했다. 모기지 관련 사업 자산 상각과 채권·신용 상품 거래에서 90억유로에 달하는 손실을 냈다.

그런데 도이체방크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 거래에서 다른 투자은행보다 상대적으로 손실이 적었다. 모기지 시장에서 위험이 감지되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증권 가치가 하락하는 쪽에 베팅해 손실 크기를 줄인 것이다. 모기지론으로 파생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 파생상품이 손실 날 것이라는 쪽에 돈을 걸었다는 뜻이다. 김홍년 NH금융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이 때문에 도이체방크는 고객의 이해에 반(反)하는 투자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했다.

미국 법무부가 지난달 도이체방크에 140억달러의 벌금을 부과한 것은 이 부분이다. 부실한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을 안전한 것처럼 팔아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주택금융지원청(FHFA)은 2011년 9월 17개 금융회사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이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알리지 않고 대량 유통해 불완전 판매했다며 17개 금융회사에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까지 골드만삭스(51억달러), 모건스탠리(32억달러) 등이 벌금을 내기로 법무부와 합의했다. 도이체방크가 다른 은행보다 많은 140억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적립해 놓은 소송 관련 충당금이 62억달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가가 급락했다. 충당금보다 78억달러나 많은 벌금을 모두 납부하면 자본 적정성이 훼손되고, 도이체방크가 발행한 코코본드의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져 투자자가 피해를 입는다.

다만 다른 은행과 비교해 도이체방크의 벌금이 과도하다는 주장이 있어 벌금이 감액될 가능성은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 MBS 시장점유율이 16.5%였지만 도이체방크는 6.4%로 크게 낮았다. 미국 법무부는 BOA에 167억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골드만삭스는 같은 사건으로 150억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지만 지난 1월 법무부와 51억달러에 합의했다.


안슈 자인 전 도이체방크(왼쪽) CEO가 지난달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올해 1월 기자회견에 참석한 존 크라이언 도이체방크 현 CEO. <사진 : 블룸버그>
안슈 자인 전 도이체방크(왼쪽) CEO가 지난달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올해 1월 기자회견에 참석한 존 크라이언 도이체방크 현 CEO. <사진 : 블룸버그>

실패 원인 2 |
과도한 파생상품 투자로 생존 위협

도이체방크엔 막대한 액수의 벌금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투자은행 부문이 비대하다 보니 은행 덩치에 비해 과도한 파생상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도이체방크가 보유한 모든 파생상품 규모는 42조유로(약 5경2400조원)로, 독일의 작년 국내총생산(GDP) 3조유로의 14배에 달한다. 이 중 절반은 스와프나 선물과 같이 청산할 수 있는 장내 파생상품이고, 나머지 20조유로는 현금화하기 어려운 이자율·통화와 같은 장외 파생상품이다. JP모건은 이 파생상품의 순시장가치가 180억유로(약 22조5000억원)에 불과할 것으로 추산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이체방크가 보유한 파생상품 규모가 크다는 것보다 레벨3 자산이 많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했다. 레벨3 자산은 거래가 별로 없어 시장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운 복잡한 파생상품이나 부실채권 등을 말한다. JP모건에 따르면 도이체방크가 보유한 레벨3 자산은 기본자기자본(Tier1)의 72% 수준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12곳 평균(38%)의 거의 2배다.

투자은행 부문이 큰 도이체방크 구조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바뀐 금융 환경에서 수익을 내기 불리한 측면도 있다. 도이체방크는 순영업수익의 42%, 세전 이익의 46%가 투자은행 부문에서 창출되고 있다. HSBC·BNP파리바 등 영국과 프랑스의 대형은행은 30% 내외다. 또 금융위기 후 대형은행이 자기자본 투자를 제한하는 추세로 각국 정부가 규제를 강화해 투자은행 부문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 유승우 동부증권 연구원은 “도이체방크 수익 구조는 수익성이 낮고 변동성이 큰 투자은행 부문에 의존하고 있어 수익 창출력과 사업 안정성 측면에서 부정적일 수 있다”고 했다.

파생상품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는 2015년에 은행 설립 이후 최악의 적자를 내는 결과를 낳았다. 도이체방크는 2014년엔 17억유로(약 2조1000억원) 흑자를 냈지만, 지난해엔 68억유로(약 8조5000억원) 순손실을 기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적자 규모가 더 크다.


실패 원인 3 |
소통 부재와 도덕성 추락

2011년 도이체방크는 투자은행 부문을 이끌던 안슈 자인을 독일사업부문장 위르겐 피첸과 함께 공동 CEO(최고경영자)에 선임했다. 자인은 투자은행 부문에서 좋은 실적을 내 도이체방크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인도 출신인 그는 독일어를 하지 못해 소통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우려는 현실화됐다. 자인 CEO는 지난해 6월 사임했다. 독일어를 못해 주요 주주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해 CEO 활동에 장애가 됐다. 또 직원 수천명을 해고하고 지점을 폐쇄하면서 노조와 언론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자인 CEO 재임 기간에는 부도덕한 행위로 벌금을 부과받으며 도이체방크의 위상이 실추됐다. 2014년 4월엔 미국과 영국 금융 당국으로부터 리보(런던은행 간 금리)를 조작한 것과 관련해 20억유로(약 2조500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지난해 5월에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입은 손실을 숨긴 혐의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5500만달러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지난해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이체방크 연례 주주총회에서 61%의 주주들은 자인·피첸 공동 CEO의 재신임에 찬성했다. 재신임은 받았지만 2014년 찬성률 89%보다 훨씬 낮아진 수치다. 주주들이 경영진에 불만을 보인 것으로 해석됐다. 결국 자인 CEO는 한 달 뒤 사임했다.

자인의 후임으로 CEO에 취임한 존 크라이언 CEO는 자인이 구축한 채권 트레이딩 사업을 축소시키고, 증권 부문을 이끌어온 책임자들을 물갈이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인 CEO를 보좌하던 부행장 2명이 최근 이탈리아 대형은행 방카몬테데이파스키디시에나와 관련된 스캔들에 연루돼 이탈리아 검찰에 기소되는 등 악재가 계속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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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본드(CoCo bond·contingent convertible bond) 은행이 발행하는 회사채의 일종.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져 경영 개선 명령을 받거나 부실 금융기관으로 분류되는 사태가 발생하면 투자 원금이 주식으로 강제 전환되거나 상각된다. 투자 위험이 커 일반 채권보다 금리가 높다.

Plus Point

도이체방크 사태 해법
자산운용 상장해 자금 조달 검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이체방크 본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이체방크 본사.

도이체방크가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대책은 크게 △벌금 감액 △자금 조달 △구조조정 △구제금융 △다른 은행과의 합병 등이 있다.

먼저 도이체방크는 다른 미국 은행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많은 미국 법무부의 벌금을 줄이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독일 빌트는 크라이언 CEO가 합의에 실패했다고 보도하는 등 상황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는 자금 조달이다. 도이체방크는 벌금 때문에 자금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알짜 사업인 자산운용 부문을 상장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전문가들은 자산운용 부문을 상장하면 기업가치가 80억유로 수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주요 주주들과 증자 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카타르 왕가 대주주들은 도이체방크 은행 지분을 25%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구조조정은 계속되고 있다. 이달 초 도이체방크 노사는 구조조정을 위해 독일에서 1000명을 추가 감원하는 데 합의했다. 기존에 합의한 국내사업부 3000명 감원 외에 1000명을 추가로 줄이는 것이다. 정부의 구제금융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독일 정부는 이탈리아 은행의 부실 문제가 불거지자 이탈리아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을 반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독일 정부가 도이체방크를 구제하고 싶어도 논리적 모순 때문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독일 정부가 지분을 가진 코메르츠방크와 합병하는 방안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