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는 표지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톡홀름의 한 커피숍이 계산대 앞에 ‘Cash free(현금 받지 않음)’문구를 내걸었다.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는 표지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톡홀름의 한 커피숍이 계산대 앞에 ‘Cash free(현금 받지 않음)’문구를 내걸었다.

“역시 현금이 최고다.”

이 우스갯소리는 스웨덴에선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스톡홀름 번화가에는 문 앞에 ‘현금을 받지 않는다’는 표지판을 단 가게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톡홀름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기차표 자동판매기에는 지폐는 물론 동전 투입구도 없다. 현금으로 표를 사려면 대기실 옆 매표소로 가야 한다. 동네 빵집은 물론 버섯과 딸기를 판매하는 노점상도 신용카드만 받는다.

도심의 호텔 커피숍에서 현금을 내면 바텐더가 난색을 표한다. 메뉴판에 동전과 현금을 표현한 그림에 ‘X’ 표가 쳐져 있다. 스웨덴의 은행 점포 절반 이상이 현금 인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스웨덴 정부가 지난 2013년 1000크로나(약 13만원) 고액권 지폐를 폐지한 이후 현금 유통량이 급감하고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요커는 “스웨덴에서 현금 없는 사회가 빠르게 구현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로고프 “100달러 이상 고액권 폐지해야”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화폐의 종말(The Curse of Cash)> 이후 현금 폐지론을 놓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로고프 교수는 대표적인 현금 폐지론자다. 그는 저서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장기화된 전 세계적 불황을 타개하고 지하경제를 막기 위해 고액권을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발행된 통화 가운데 100달러짜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1990년대 후반 60%에서 지난해 80%를 넘은 것으로 조사됐다. 로고프 교수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지 않는 100달러 고액권이 범죄에 사용된다고 추정했다. 미국 달러화는 비공식 통화로 전 세계적으로 활용된다. 그는 “100만달러를 현금으로 운반할 때 100달러 지폐로는 쇼핑 가방 하나면 충분하지만, 10달러로는 포대 자루 20개 이상이 필요하다”고 그 근거를 댔다.

고액권 폐지는 탈세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 국세청에 따르면 매년 덜 걷히는 세금은 4600억달러에 달한다. 로고프는 이어 불법 이민자의 임금이 현금으로 지급되는 만큼 지폐 폐지는 불법 이민 억제에도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통화 정책 측면에서 지폐 폐지로 각국이 보다 적극적이고 유동적인 금리 정책을 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낮추고 있다. 유럽연합(EU), 일본, 스웨덴 등 일부 선진국은 저성장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각국 중앙은행은 일종의 충격 요법 차원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저성장 경제에서 금리를 낮추면 기업들은 투자할 때 저금리 혜택을 보고, 소비가 촉진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다. 로고프 교수는 마이너스 금리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현금을 금고 안에 쌓아뒀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현금 없는 사회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금 거래 감소는 전 세계의 공통적 현상이다. 벨기에의 소비자 거래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 호주의 현금 거래 비중은 최근 6년 동안 30% 급감했다. 인도는 최근 현금 거래와 현금 보유액 상한제 도입을 고려 중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에선 M페사와 같은 모바일 결제가 현금 결제 비중을 넘어섰다.

하지만 현금 폐지 찬성만큼 반대론도 거세다. 블룸버그는 “현금 폐지론자들은 인류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일간지 뉴요커는 스웨덴의 사례를 들어 지폐 없는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장애물은 개인 정보 보호라고 지적했다.

현금 없는 사회에서 모든 금융 거래는 보안 프로그램하에서 구동되고, 포인트도 자동으로 쌓인다. 거래 정보는 시간과 장소까지 디지털로 기록된다. 국세청은 금융 추적으로 손실 세수를 회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고나라에서 20만원에 판매한 세탁기도 과세 대상이 될 것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장기 불황을 막고 지하경제를 억제하기 위해 고액권을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 블룸버그>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장기 불황을 막고 지하경제를 억제하기
위해 고액권을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 블룸버그>

“13세기 中 원나라 실패 따를 것”

지폐가 없는 세상은 말 그대로 ‘돈’이 없는 세계다. 돈은 현재 소유자에게 속한다. 지폐를 분실하거나 도난당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폐를 현(現)금이라고 부른다. 은행 계좌에 든 돈은 실제 돈이 아니라, 돈 청구할 권리, 소유권이다.

현금 없는 사회에서 모든 금융거래는 은행 등 금융기관을 통해야 한다. 민간 기관인 은행이 재량에 따라 지급을 거부할 권한이 생긴다는 것은 큰 문제다. 고액권 폐지의 범죄 억제 효과가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해 영국 정부가 실시한 자금세탁 테러 자금 조달 위험 평가에 따르면 오히려 HSBC 같은 은행과 파나마 페이퍼에 연루된 모색 폰세카 같은 회계서비스 업체가 자금세탁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금은 위험도에서 세 번째에 머물렀다. 나아가 현금이 정말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현금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게 될 수밖에 없다. 마약 밀매는 다시 성행할 것이고, 담배나 조개껍질이 현금을 대체할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로고프는 저서에서 현금 유통을 막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13세기 원나라 쿠빌라이 칸 황제 때 금이나 은을 교환재로 사용하면 사형에 처한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강박에 가깝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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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 폰세카(Mossack Ponseca) 역외 금융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파나마 소재 최대 로펌. 지난 4월 이 회사가 보유한 약 1150만 건의 비밀문서가 유출되면서 조세회피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인물들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