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규제 완화를 강조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대형 은행의 영업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미국 대형 금융사가 밀집한 월스트리트. <사진 : 블룸버그>
금융 규제 완화를 강조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대형 은행의 영업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미국 대형 금융사가 밀집한 월스트리트. <사진 : 블룸버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미국 금융사들이 모인 월스트리트가 기지개를 펴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주식시장에서 금융주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미국 주요 투자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와 JP모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는 트럼프 당선 이후 주가가 올해 최고치로 치솟았고, 웰스파고와 UBS 주가도 큰 폭으로 올랐다. 이들 금융주가 크게 상승한 이유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금융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선거 유세 기간, 구체적인 금융 정책 방향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금융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관되게 펼쳤다. 트럼프 당선 직후 미국 시장 금리가 상승세를 보인 것 역시 금융사 주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트럼프는 미국 기준금리 운용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 인프라 투자에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투자 재원을 마련하려면 막대한 규모의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에 금리가 상승했다.


규제·저금리로 이중고 겪은 월스트리트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월스트리트는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월스트리트를 이끌던 금융사 CEO들은 미국 의회에 불려가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월스트리트의 활동을 통제하고 감독하기 위해 3500쪽 규모의 400개 법안을 만들었다. 2010년 7월 발효된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이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역할을 분리한 ‘볼커 룰’이 적용되며 투자은행 업무가 엄격히 제한됐고, 금융지주회사와 지급결제시스템에 대한 감독이 강화됐다. 금융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소비자금융보호국(CFPB)도 신설했다. 미국 대형 은행의 활동 반경이 크게 좁아진 셈이다. 경기 침체 이후 장기화한 저금리 환경에서 금융사의 수익이 악화된 것 역시 월스트리트를 압박했다. 미국 은행의 순이자마진(NIM)은 2010년 3.7%에서 지난해 3.0%로 하락했다.

영업 환경이 어려워지며 은행 실적이 악화됐고 대규모 구조조정과 각종 스캔들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 주요 은행은 인력을 감축하고 사업 부문을 줄이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한편 미국 대표 은행 웰스파고는 지난 9월, 2011년부터 고객 몰래 200만개의 ‘깡통 계좌’를 만든 것이 적발돼 미국 연방소비자금융보호국으로부터 과징금 1억8500만달러(약 2172억원)를 부과받았다.

앞서 미국 법무부는 도이체방크가 금융위기 이전인 2005~2007년에 부실 모기지담보부증권을 불법 발행해 판매한 혐의로 벌금 140억달러를 부과했다. 영업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실적 경쟁이 금융사의 대형 스캔들을 빚은 것이다.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미국 주식시장에서 금융주가 크게 상승했다. 뉴욕증권거래소 TV 화면에 트럼프가 연설하는 모습이 방송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미국 주식시장에서 금융주가 크게 상승했다. 뉴욕증권거래소 TV 화면에 트럼프가 연설하는 모습이 방송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시장 금리 인상에 월가 은행들 반색

트럼프의 대통령직 인수위는 선거 직후 “도드-프랭크 법안을 폐기하고 금융 규제를 새 법률로 대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드-프랭크법 지지자들은 이 법이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고 경기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규제가 시행된 이후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도드-프랭크법이 금융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일자리를 줄이는 잘못된 규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는 “(지나친 규제로) 은행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고 있다. 규제가 은행을 운영하고 있다”며 “도드-프랭크법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인수위는 월스트리트에 대한 규제 완화 작업 검토에 착수했다. 일부 규제의 예외를 인정하고 금융 당국의 규제 권한을 줄이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계에서는 도드-프랭크법이 금융위기를 방지하는 데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가 주택담보대출 기준을 완화했기 때문인데 정작 이에 대한 규제 방안은 법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금융 규제를 주도했던 메리 조 화이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 내년 1월 조기 사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도드-프랭크법이 폐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SEC는 도드-프랭크법 시행 이후 금융시장 규제를 강화했고, 2013년 4월 임기를 시작한 화이트 위원장은 규제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화이트 위원장의 원래 임기는 2019년까지다. 시티그룹의 수잔 로스 카츠케 애널리스트는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미국 경제 성장과 은행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프는 통화정책 운용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진 않았다. 그는 당선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초저금리 정책을 너무 오래 유지한 것은 잘못된 정책이다. 대통령이 되면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연임하도록 두지 않겠다”라면서도 “당장 금리를 올리면 미국 경제가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또 트럼프는 미 연준에 대한 감사가 이뤄져야 한다고도 언급했다. 현재의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금리를 인상하겠다는 것인지 입장이 불분명하다. 그런데 트럼프 당선 이후 시장 금리는 상승했다. 통화정책에 대한 언급보다 오히려 재정 확대에 대한 계획이 금리를 끌어올렸다. 트럼프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했는데, 이 공약이 시행될 경우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금리는 상승하게 된다.

월스트리트 출신 인사가 트럼프 행정부 재무장관에 임명될 가능성도 크다.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새 정부 재무장관에 골드만삭스 출신 스티븐 너친이 유력하다. 골드만삭스에서 18년간 일한 그는 회사를 나온 이후 헤지펀드 회사를 차려 막대한 투자 수익을 거뒀다. 아바타, 엑스맨 같은 유명 할리우드 영화에 투자해 성공한 경력도 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과 존 폴슨 폴슨앤드컴퍼니 회장, 투자자 월버 로스 역시 재무장관 후보로 거론된다. 트럼프 캠프에는 월스트리트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됐는데 재무장관을 포함해 트럼프 행정부 경제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유세 기간 “월스트리트가 감독이나 견제받지 않고 뭐든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월스트리트는 이미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했다”며 대형 금융사들을 비판했지만, 월스트리트 출신 인사가 재무장관 등 주요 직책을 맡으면 행정부와 은행 간 긴밀한 소통 창구가 마련될 뿐 아니라 경제 정책에도 이들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다.

트럼프는 부실 금융사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데에도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이다. 트럼프는 지난 2009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부실한 금융사에) 자금을 지원하든 국유화하든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금융사가 계속 생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10월에는 “구제금융이 효과가 있든 없든 지원할 가치는 분명 있다”고도 했다.


웰스파고의 ‘유령계좌’ 스캔들은 강화된 규제와 저금리 환경에서 무리한 실적 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다. <사진 : 블룸버그>
웰스파고의 ‘유령계좌’ 스캔들은 강화된 규제와 저금리 환경에서 무리한 실적 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다. <사진 : 블룸버그>

민주당의 규제 완화 반대가 변수

당장은 트럼프 당선이 월스트리트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지만 전망이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금융 규제 완화 가능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공언한 금융 규제 철폐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금융 규제 완화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의원은 트럼프가 친(親)월스트리트 행보를 보이는 것을 비판하며 도드-프랭크법을 폐지하려는 시도를 막겠다고 했다. 3500쪽에 달하는 도드-프랭크법은 규모가 방대하고 내용이 복잡해 이를 완화하는 작업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경제 정책이 효과를 내지 못하며 미국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질 경우 월스트리트에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트럼프는 세금 감면과 재정 확대를 통한 인프라 투자로 경기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경제 정책이 효과를 내지 못하고 정부의 재정 적자만 확대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골드만삭스의 스벤 자리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의 경제 정책은 물가 상승만 부추길 뿐 실업률을 더 높이고 경제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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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금융 규제 핵심인 ‘도드-프랭크법’ 폐기 발표 대선 이후 골드만삭스·BoA·JP모건 등 주식 최고가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 7월 발표한 금융개혁법안으로, 대공황 이후 최대 금융개혁법안으로 불린다. 금융회사에 대한 규제·감독 강화, 금융감독기구 개편, 중요 금융회사 정리 절차 개선, 금융지주회사·지급결제시스템 감독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볼커 룰(Volcker rule) 미국 금융사의 위험 투자를 제한하고 은행이나 비은행 회사의 대형화를 억제하기 위해 버락 오바마 정부가 2010년 만든 금융 규제다. 당시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을 맡던 폴 볼커(Paul Volcker)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아이디어가 상당 부분 반영돼 볼커 룰이라고 불린다. 금융사가 보유한 고유 자금을 주식·채권 등에 단기로 투자하는 행위(트레이딩 계정 거래)와 헤지·사모펀드에 투자하는 것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순이자마진(NIM) 은행의 전체 자산에서 이자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은행의 수익성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다.

채권 가격과 금리 채권이 많이 발행되면 그만큼 공급이 늘어나기 때문에 채권 가격은 하락하고, 채권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금리(채권 수익률)는 상승한다.

interview 도미니크 바튼 맥킨지 회장

트럼프, 금융 규제 핵심인 ‘도드-프랭크법’ 폐기 발표 대선 이후 골드만삭스·BoA·JP모건 등 주식 최고가

“미국·유럽 금융 규제 과잉… 한국은 시장 더 개방해야”

연선옥 기자

도미니크 바튼 맥킨지 회장은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를 갖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금융 규제를 강화하면서 시스템은 안정됐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규제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졌다”고 밝혔다. 그는 “규제가 지나친 수준에 이르면 비공식 대출 증가 등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풍선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며 “또 성장을 위해 금융 지원이 필요한데 규제로 인해 더딘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바튼 회장은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강화된 규제 환경과 저금리 기조가 금융사 수익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는 상황을 언급했다. 2007년 17% 수준이던 미국 은행권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최근 10% 아래로 하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위기 이후 강화된 규제가 대형 금융사의 스캔들과 구조조정 같은 문제를 표면화시켰다”며 “수익성을 회복하기 위해 은행들이 더 많은 리스크(위험)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문제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저금리로 인한 ‘자산 버블’ 걱정

물론 바튼 회장은 위기 이후 각국 정부가 마련한 금융 규제책이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금융 규제는 탄탄해졌고, 금융 안정성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바튼 회장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시스템 안정이 중요한 이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국가는 금융시장 성장이 필요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금융 규제가 강화되다 보니 성장이 정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 더 개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바튼 회장은 특히 중국 알리바바와 한국의 카카오뱅크를 비교하며 “알리바바는 여신(대출)도 가능하지만, 카카오뱅크는 아직 은행 라이선스도 받지 못했다”며 “지나친 규제로 한국 금융 산업이 뒤처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핀테크 열풍 등이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에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핀테크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금융사로는 로열뱅크오브캐나다, 영국의 로이드뱅크, 중국 핑안보험, 미국 블랙록 등을 꼽았다.

한편 바튼 회장은 세계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위험 요소로 자산시장의 버블(거품)을 꼽았다. 그는 “과거보다 금융시스템 간 연결이 덜 촘촘하기 때문에 시스템상의 위기가 당장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고 보지만, 저금리 환경에서 너무 많은 자금들이 자산시장에 쏠리며 버블이 형성됐다”며 이것이 세계 금융시장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가장 ‘취약한 고리’라고 말했다.

바튼 회장은 대표적으로 중국 부동산 시장 버블이 우려된다며 “금융 당국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통적인 은행이 아니라 P2P 대출 등 규제가 느슨한 비(非)전통적인 금융 분야”라고 강조했다. 바튼 회장은 “중국에 P2P 대출 업체가 수천여개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금융 규제의 손이 미치지 않는 이 시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금융 시스템 전체로 리스크가 번질 수 있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 경제가 회복되고 있고 중국 경제도 비교적 탄탄한 모습이지만 이 중 한 개 동력만 삐걱대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근본적으로 저금리 환경에서 어디로 돈이 들어갔고, 어디에서 버블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 도미니크 바튼
옥스퍼드대 경제학 석사, 맥킨지 서울사무소 대표, 이명박 대통령 국제자문단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