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기상 조건이 좋았던 덕분에 곡물 생산량이 크게 늘어 국제 곡물가격이 하락세다. 올 들어 밀 가격은 21% 떨어졌다. 미국의 밀 농장 전경 <사진 : 블룸버그>
올 여름 기상 조건이 좋았던 덕분에 곡물 생산량이 크게 늘어 국제 곡물가격이 하락세다. 올 들어 밀 가격은 21% 떨어졌다. 미국의 밀 농장 전경 <사진 : 블룸버그>

“올해는 제 농업 인생 20년 만에 수익률이 최악인 한 해로 기록될 겁니다.”

미국 인디애나와 오하이오에서 5000에이커(약 610만평)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는 벤 무어는 최근 업황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국제 곡물 가격이 급락한 데 따라 매출이 반 토막 났기 때문이다. 무어 집안은 이 지역에서 6대째 옥수수와 콩을 경작하고 있다. 그는 빠듯한 자금 사정 탓에 올해 농기계 구입 계획을 미뤘고, 농약과 비료 내년에 심을 종자도 저렴한 제품 위주로 보고 있다.

국제 곡물 가격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밀 가격은 1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옥수수 선물 가격은 올 들어 약 13% 하락했다. 국제 곡물 가격은 최근 7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밀 가격은 21%가 빠졌다.


농산물업체 카길, 영업이익 반 토막

8월 29일 연질 밀 겨울 인도분 선물가격은 2006년 9월 이후 가장 낮은 1부셸당 3.83달러를 기록했다. 고점을 찍었던 2008년보다 71%가 밀렸다. 2012년 1부셸 당 8달러까지 치솟았던 국제 옥수수 선물 가격은 최근 3.11달러까지 하락했다.

곡물 가격이 급락한 것은 올 여름 기상 조건이 좋아 미국·러시아 등 글로벌 주요 곡물 생산국의 생산량이 급증한 탓이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최근 미국의 겨울 밀 수확량은 4500만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 증가했다. 미 농무부는 옥수수와 콩 작황도 각각 152억부셸, 41억부셸을 기록, 사상 최대치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고 이달 초 전망했다.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는 올해만 7000만t이 넘는 밀을 생산했다. 호주의 올해 밀 생산량은 5년 만에 최대치인 2650만t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곡물이사회(IGC)는 올해 글로벌 밀 생산량을 전년보다 1% 늘어난 7억4300만t으로 예측했다. 압돌레자 아바시안 유엔(UN) 세계식량기구(FAO)의 곡물 이코노미스트는 “밀 소비는 가격이 낮다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구에 비례한다”며 곡물 가격 추가 하락을 시사했다.

미국 농장 소득은 2009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농가가 재고량 증가와 글로벌 수출 시장 경쟁 격화로 침체를 겪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 농무부에 따르면 올해 미국 전체 농가 소득은 전년(807억달러) 대비 11.5% 하락한 715억달러(약 80조원)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WSJ은 “미 농가는 달러화 강세와도 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달러화가 오르면 수출 가격이 올라 해외 수요가 줄어든다.

미 농가는 비용 절감에 나섰다. 이에 따라 농기계 및 비료, 곡물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8월 초 트렉터 공급업체인 디어앤드코(Deer&Co)는 농업용 트랙터와 콤바인 생산을 줄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계 최대 곡물 기업인 카길은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곡물 가격 하락에 영업이익이 급감한 탓이다. 카길의 2016회계연도 영업이익은 16억4200만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2011년 대비 반 토막이 났다. 카길은 2016회계연도에 돼지고기 사업 부문을 포함해 제강업·보험업 등 24억달러(약 2조7000억원)어치의 사업을 매각하기로 했다.

식품 물가 하락으로 코스트코와 홀푸드마켓 등 6대 대형마트와 시스코 등 상장 식품 유통업체의 지난해 4분기 영업마진은 큰 폭으로 줄었다. 미 정부가 지급하는 농가 보조금은 전년 대비 25% 늘어난 135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 정부는 농작물 가격이나 매출이 급격히 하락할 경우 보험과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월가에는 곡물 가격 하락의 반작용으로 올 연말이 가기 전에 이머징마켓으로 자금 유입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시티은행의 데이비드 루빈 이머징마켓 부문장은 “곡물 가격 하락은 선진국보다 신흥국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며 “신흥국 소비자물가(CPI) 바스켓에서 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가 하락으로 신흥국 금리 인하 가능성

우크라이나는 식품과 무알코올 음료가 소비자물가 통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이른다. 인도는 45%, 필리핀·페루·루마니아·러시아·태국·말레이시아·콜롬비아도 25% 이상 차지한다. 이들 신흥국에서는 유가보다 식품 가격이 소비자물가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루빈 부문장은 “신흥국 중앙은행이 물가지수를 발표하기 시작하는 올해 말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할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며 “브라질·콜롬비아·페루 등의 통화 긴축 정책에 종지부가 찍힐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흥시장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초 4.5%에서 지난 6월 3.8%로 하락했다. 미국 컨설팅 회사인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의 윈 신 신흥국 통화 전략 글로벌 부문장은 “브라질은 10월 중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되며, 칠레와 페루는 내년이면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앞서 인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은 기준금리를 내렸다.

반면 정보분석업체인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닐 셰어링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식품 가격 하락세가 국내 수요 감소보다는 글로벌 기후 변화에 따른 것인 만큼 중앙은행들은 식품 가격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고 좀 더 신중히 접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내년이면 국제 유가 하락세도 멈출 것으로 예상된다”며 “유가가 상승하면 식품 가격 디플레이션도 영향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셰어링은 이어 “미 연준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며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물가 하락과 외환 유출 사이에서 고민하며 기준금리 결정에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과일과 채소 가격은 상승세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 가뭄으로 7월 과일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1.4%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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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가격지수(Food Price Index)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1990년 이후 곡물, 유지류, 육류, 유제품 등 23개 품목에 대한 국제가격동향을 모니터링해 5개 품목군별로 매월 작성, 발표하는 가격 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