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9월 21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마친 뒤 중앙은행의 자금 공급량 그래프를 옆에 두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AP>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9월 21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마친 뒤 중앙은행의 자금 공급량 그래프를 옆에 두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AP>

일본은행이 9월 21일 금융정책을 전환했다. 국채금리를 일정 수준으로 조정하는 ‘금리 목표’를 새로 도입했다. 금융정책의 축을 자금 공급량에서 장단기 금리로 전환한 것이다. 단기 금리는 현재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장기 금리는 0% 정도가 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현재 -0.1%인 정책금리는 동결하고 현재 금리가 마이너스인 10년물 국채 금리가 0% 수준이 유지되도록 신규 국채 매입 물량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일본은행은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를 안정적으로 넘을 때까지 금융 완화를 지속하기로 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21일 기자회견에서 “앞선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한층 강화했다”며 “(물가상승률 목표 달성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구로다 총재의 입지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일본 대형은행의 은행장은 “부작용이 있다”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비판했다. 구로다 총재는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장기 금리를 조정한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하는 주장도 나온다. 금융시장에선 장기 금리와 단기 금리 차가 커지면 앞으로 경기가 좋아지고 금리 차가 줄어들면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해석한다. 이를 투자자들의 판단이 아닌 일본은행의 인위적인 시장 조작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 심리를 자극하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나온다.


“불가능” “오판” “언론 플레이” 비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아베노믹스’는 △금융완화 △기동적 재정정책 △구조개혁 등 ‘3개의 화살’이 핵심 내용이다. 금융완화로 물가상승률 2%를 달성하고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물가상승률 2%’라는 목표는 좀처럼 이루지 못했고 목표 달성 시기가 점점 늦춰지다 이번엔 ‘달성할 때까지’ 금융완화를 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양적·질적 금융완화가 원하는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해 마이너스 금리도 도입했지만 오히려 지난 3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보다 0.1% 하락하기까지 했다. 엔화 가치도 이번 정책회의 직후 잠깐 약세로 돌아섰지만, 다시 강세를 보이며 한 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구로다 총재가 언론 플레이를 한다며 비판한 곳은 모건스탠리다.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9월 14일 일본은행이 9월 20~21일 열리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폭을 확대할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16일 모건스탠리MUFG증권의 야마구치 다케시(山口毅)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에 대해 “보도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면 회의를 열기도 전에 언론을 통해 먼저 정보를 유출했다는 논쟁이 일 것”이라며 “일본은행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장단기 금리차(수익률 곡선)를 조정하겠다는 구로다 총재의 아이디어도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자문은 “10년물 국채금리를 특정 수준에 맞추겠다는 정책 목표는 있을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라며 “직접적인 금융통제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선진국이 신흥국에 해온 조언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일본은행의 변칙적인 통화 정책은 이득은 없고 비용은 늘어나며 위험은 커질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일본은행은 2년 전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국채 수익률 곡선을 평평하게(장단기 금리차가 적게) 만들었지만 (장기금리를 0%로 만드는) 이번 조치로 정책 신뢰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했다. 영국 투자자문사 크로스보더캐피털은 “수익률 곡선의 기울기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이란 일본은행의 생각은 오판(誤判)”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언론도 새 금융정책에 부정적

이번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앞서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더 확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자, 피해를 보는 민간 은행에선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의 오야마다 다카시(小山田隆) 은행장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 대해 부작용을 검증해 달라고 일본은행에 요구했다. 그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마이너스 금리는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작용이 있다”면서 “일본은행이 그 부작용과 실제 모습을 상세히 검증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일본의 은행들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으로 이자 수익이 줄어들어 경영 압박을 받고 있다.

장기 금리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선 일본 언론도 의문을 갖고 있다. 장기 금리는 여러 요인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금리 조작이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와 관련해 구로다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장기 금리 조작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2008년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부도 쇼크 이후 장기 국채를 매입해 왔고 (대출 금리 인하 등의) 효과가 나오고 있다”면서 과거에도 금리를 움직인 경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구로다 총재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과 달리, 일본 언론들은 새로운 금융 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사히 신문은 “각종 장단기 금리를 ‘적정한 수준’으로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일본은행이 조작의 수단을 확대하는 것에 부작용은 없을 것인지 의문이 많다”고 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아베노믹스의 첫 번째 화살로 주목받았던 양적·질적 금융완화를 시작한 지 약 3년 반이 지났지만, 이런 검증과 틀의 변경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조치가)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며 “무모한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목표인 물가상승률 2%에 이르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단기 결전을 노렸던 구로다 총재는 지구전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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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기 금리차 일반적인 경우 장기 금리는 단기 금리보다 높게 형성된다. 장기채권은 단기채권보다 유동성이 낮고 금리 변동, 채무 불이행 등의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또 경기가 좋아져 단기 금리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면 장기 금리도 오르고 장단기 금리차가 커진다. 반대로 앞으로 경기가 악화돼 단기 금리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 장기 금리가 현재의 단기 금리보다 낮아져 장단기 금리차가 축소된다. 그래서 장단기 금리차는 경기 선행지수의 하나로 쓰인다. 장단기 금리차를 나타내는 수익률 곡선이 매우 평평하거나 역전되는 것은 경기 침체 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