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경제학 분야의 핵심 이론가인 폴 로머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가 거시경제학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나섰다. 핵심 타깃은 1970년대 이후 세를 확장한 신고전파 이론과 관련 학자들이다.
거시경제학 분야의 핵심 이론가인 폴 로머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가 거시경제학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나섰다. 핵심 타깃은 1970년대 이후 세를 확장한 신고전파 이론과 관련 학자들이다.

“30년 이상 거시경제학은 퇴보해왔다.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이론적 가설을 판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스태그플레이션 문제가 대두된) 1970년대 수준의 신뢰성만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론적인 모호함을 활용해 도망칠 뿐이다. 경기 변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드는 것들은 어떤 사람도 경제 활동을 하는 데 고려하지 않을, 가상의 우연적인 변수들이다.”

거시경제학의 거두 가운데 한 명인 폴 로머 세계은행(WB) 수석이코노미스트가 현재 거시경제학의 핵심 이론과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미국 경제학계의 풍토에 직격탄을 날렸다. ‘탈현실 거시경제학’ ‘플로지스톤(근대 화학이 성립되기 전에 불을 일으킨다고 여겨졌던 가상의 원소) 같은 충격’ ‘퇴행’ ‘돼지가 립스틱을 바른 격’ 등 좀처럼 학계에서 볼 수 없는 노골적인 표현까지 사용했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기술 발전을 경제 성장 이론에 포함시켜,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의 상호작용을 다룬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을 개발한 업적 등으로 현대 거시경제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노벨경제학상 단골 후보이기도 하다. 올해 7월에는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미국 뉴욕대에서 세계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비판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경제학계 안팎이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이론 요소들이 모호해 현실 검증 불가능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9월 14일 자신의 블로그(http://paulromer.net)에 ‘곤경에 처한 거시경제학(The Trouble With Macroeconomics)’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분량은 A4용지 25쪽. 원래 이 글은 1월 미국 저명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오미크론델타엡실론협회(ODE) 회동에서 있었던 기념 강연 원고였다. 경제학계 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질 만큼 알려진 내용이었다는 얘기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ODE가 발간하는 <아메리칸 이코노미스트>에 실려 곧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글이 겨냥하는 주 대상은 현재 거시경제 분석 및 경기 예측에 가장 널리 쓰이는 동적확률일반균형(DSGE) 모형이다. DSGE는 현재 전 세계 중앙은행과 국제기구가 경제 분석의 핵심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RB)를 시작으로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각각 2006~2008년 DSGE에 기반한 경제 예측 모형을 개발해 공식 채택했다. 한국은행도 2007년부터 ‘BOKDSGE’라는 명칭으로 채택해 사용한다. 현재 거시경제학의 표준 이론을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공격한 것이다.

DSGE는 1970년대 로버트 루카스, 토마스 사전트 등 이른바 ‘시카고 학파’가 당시 케인스 경제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개별 경제 주체들의 합리적 기대와 그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강조한다.

여기에 1980년대 초 에드워드 프레스콧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핀 키들랜드 카네기멜론대 교수 등이 주창한 실물경기변동(RBC· Real Business Cycle) 이론의 영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프레스콧과 키들랜드는 기술 발전과 인구 증가 같은 요인이 거시경제 균형에 ‘충격’으로 작용하는데 그 작용 방식이 개별 경제 주체들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형태이기 때문에 정교한 모형을 통해 장기적으로 관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공세에 대항해 신케인지언 학파 경제학자들은 산업 조직의 독과점적 형태나 가격 조정의 불연속성 등을 강조해 독자적인 DSGE 모형을 개발한다. 실제로 중앙은행이 사용하는 DSGE 모형은 신케인지언 이론에 가깝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비판이 단순한 DSGE 이론을 넘어 신고전파 이론의 기반과 프레스콧, 사전트 등에 대한 실명 비판까지 확장된 이유다.


2016년 1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경제학회 연차 총회에 전세계 경제학자들이 모여 강연을 듣고있다. <사진 : 미국경제학회>
2016년 1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경제학회 연차 총회에 전세계 경제학자들이 모여 강연을 듣고있다. <사진 : 미국경제학회>

“학자들이 서로 약점 감싸주고 있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의 첫 번째 논점은 DSGE나 RBC가 중요하게 간주하는 ‘충격’이 현실에서 관찰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단위 생산요소당 소비재 및 자본재 생산량 변화, 임금과 가격의 무작위적 변화, 투자자의 선호 정도, 사람들이 근로 시간 대신 여가를 선호하는 정도 등 현실에서 측정할 수 없는 변수들을 다루기 때문에 과학적 엄밀성을 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별 ‘충격’ 요인들에 대해 플로지스톤, 에테르(진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19세기 이전 사람들이 에너지 전달 매개라고 생각한 가상의 물질), 트롤(가상의 생명체), 그렘린(기계에 몰래 붙어 있는 난쟁이 요정)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가상의 변수를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두 번째 문제는 이론을 실제 자료에 맞춰 검증하는 판별(identification)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알려지지 않은 진짜 값’을 가지고는 가장 단순한 수요-공급 곡선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통계적 기법들을 사용하지만 결함이 많고, 모호한 결과를 내기 일쑤라는게 그의 논리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신고전파 거시경제학의 주요 인물인 루카스, 프레스콧, 사전트의 ‘자기 식구 챙기기’식 행태도 신랄하게 공격했다. 경제학계 내부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이들 신고전파 인물들은 서로를 지지하면서 약점을 감싸주기 바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쌓은 명성과 권위를 맹종하는 다른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오류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계 비판에 대한 반응은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8월 올리비에 블랑샤 전 IMF 수석이코노미스트가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보고서에서 “DSGE는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지만 거시경제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델”이라고 점잖은 어조로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DSGE를 활용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경제 현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비판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로머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비판에 대해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고, 배가 튀어나왔다는 걸 이야기한 격”이라며 우호적인 논조로 보도했다. 현재 거시경제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학계 안팎에서 공감하는 기류가 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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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적확률일반균형(Dynamic Stochastic General Equilibrium) 현대 거시경제학에서 경기 변동을 관측하고 통화 및 재정 정책의 영향을 예측하는 데 널리 쓰이는 이론 모델. 일반균형이란 표현은 경제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기술, 인구 등 외부 충격으로 인한 경기 변동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 변화, 경제 성장으로 인한 기술 발전, 대외교역 변수까지 모두 포함한다. 기업, 근로자 등 경제주체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과정에서 경제 전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경제 주체들의 의사 결정은 미래가 불확실하고 다른 이들의 움직임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걸 감안해 이뤄진다. 이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하나로 답이 정해져 있기보다 특정 확률로 각각의 대안들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확률’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