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수출은 원화가 강세를 보였음에도 11.2%의 증가세를 보였다. <사진 : 블룸버그>
올해 1월 수출은 원화가 강세를 보였음에도 11.2%의 증가세를 보였다. <사진 : 블룸버그>

‘고(高)환율이 수출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그동안 상식처럼 여겨졌다.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에서는 수출 제조업 중심의 경제 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고환율을 지지해온 측면이 있다.

대표적 사례가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수출 증가를 통한 경기 부양을 위해 고환율 정책을 구사했다. 이전 노무현 정부에서 평균 900원대에 머문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2008~2009년 기간에 5개월 이상 1400원대를 유지했고 최고 1570원대까지 뛰었다. 당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은 수출 호조로 인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경제성장률(국내총생산)을 비롯한 경제 지표도 호전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환율이 수출 증가에 주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최근 글로벌 교역과 환율의 관계’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2003~2006년)에는 환율이 1% 절하되면 수출이 0.56% 증가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2012~2015년)에는 0.28%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한은은 2001~2015년 기간 158개국 자료를 바탕으로 수출 물량 결정 요인을 분석했는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환율 상승의 수출 확대 효과는 눈에 띄게 약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하고 있다”면서 “2010년 이후에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즉 과거처럼 환율을 끌어올려 수출을 늘리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분석이다.

고환율의 수출 개선 효과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세계은행은 통화 약세로 인한 수출 증가 효과가 전 세계적으로 40% 정도 감소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일본의 엔화 환율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달러당 104엔대에서 118엔대로 13%가 급등했지만 수출은 전월 대비 4.5% 늘어나는 데 그쳤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2011년 7월 이후 브라질 헤알화는 159% 절하됐으나 브라질의 수출은 19% 이상 감소했다.


원인 1 |  글로벌 공급망 확산

전문가들은 환율과 수출의 상관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글로벌 무역 구조의 변화를 꼽는다. 글로벌 공급망 구조가 변했다는 설명이다. 과거에는 완성품 생산이 대체로 한 국가 내의 분업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이제는 글로벌 분업 구조가 성숙 단계에 이르렀다. 부품 생산과 중간재 생산 등 분업 구조가 전 세계적으로 구축돼 특정 국가의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자연스럽게 감소했다는 분석이다.

가령 호주산 와인은 호주에서 생산돼 전 세계로 수출된다. 호주달러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면 해외에서 호주산 와인 가격은 하락하고, 가격 경쟁력이 생긴 덕에 더 많이 팔리게 된다. 반면 경쟁국인 프랑스나 칠레산 와인은 호주에서 환율 효과로 더 비싸게 팔리게 돼 호주 와인 업계는 이중으로 이득을 보게 된다.

하지만 중국에서 조립되는 스마트폰은 다르다. 애플은 스마트폰을 중국에서 최종 생산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은 중국 외에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에서 가져온다. 즉 환율 효과가 일정하지 않다. 중국 위안화가 약세일지라도 미국 달러화나 일본 엔화가 강세라면 이익을 봤다고 얘기하기 힘든 것이다.

이런 흐름은 갈수록 강화되는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무역기구(WTO)가 세계 공급망과 교역 흐름을 분석한 결과 각국의 수출 제품에서 해외산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급증했다. 한국의 경우 1995년 22.4%에서 2011년 41.6%로 높아졌다.


원인 2 | 수요 부진 속 높아진 해외 생산 비중

높아진 해외 생산 비중도 환율과 수출의 상관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제조업 강국인 일본이 대표적 사례다. 산업연구원은 통화 약세를 유도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아베노믹스’는 주력 산업인 자동차와 전기전자 업종 수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엔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해외 생산 비중이 높은 제조업이 현지 경기 침체로 수요가 줄면서 수출도 덩달아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일본 제조업의 평균 해외 생산 비중은 1990년 4.6% 수준에서 2006년 17.3%, 2012년 20.6%, 2013년 22.3%로 빠르게 증가했다. 일본 기업들의 해외 생산 확대는 ‘엔화 약세→제품 가격 하락→수출 증가’라는 선순환보다는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 상황과 맞물려 ‘현지 수요 감소→수출 하락’의 흐름으로 나타났다. 즉 ‘수요 감소→현지 생산 하락→중간재·자본재 수요 감소→수출 부진’의 악순환으로 이어진 것이다. 현지 시장의 경기 침체로 수요가 줄면 일본에서 나가는 중간재와 자본재 수출도 함께 줄어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은 2012년 평균 79.8엔에서 2014년 평균 105.8엔으로 꾸준히 가치가 하락했지만 수출 부진은 해소되지 않았다. 일본의 대(對)세계 수출은 2011년 8200억달러를 기록한 이후 2014년 6900억달러로 3년 연속 하락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런 점을 감안해 “국내 기업 투자의 상당 부분은 해외 투자”라면서 “수출을 위해 ‘(미국 달러화에 대비해) 원화를 싸게 가야 한다’는 패러다임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뿐만 아니라 유로화, 중국 위안화 환율을 모두 살펴서 국가 전체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환율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원인 3 | 경쟁국의 환율 영향

고환율이 과거와 달리 수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경쟁 국가들과의 치열한 환율 전쟁 때문이다. 가령 원화 가치가 하락해도 최대 수출 경쟁국인 일본의 엔화 가치 하락폭이 더 크면 상대적인 해외 가격 경쟁력은 오히려 악화하게 된다.

실제 트럼프로 인한 달러화 강세의 영향도 세계 각국이 다르게 받고 있다. 올해 들어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 상승률은 4.82% 상승해 주요 20개국(G20) 중 호주(6.26%)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다. 일본 엔화(3.71%), 중국 위안화(1.12%) 등 대부분이 상승세를 보였지만,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더 많이 올라 한국 수출기업들의 경쟁력이 더 약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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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외국 돈을 살 때 지불하는 외국 돈의 가격을 환율이라 한다. 달러당 환율이 1000원이라는 것은 1달러를 살 때 지불하는 가격이 1000원이라는 의미다. 원화 환율 상승은 한국 경제에 ‘양날의 칼’과 같다. 원화 약세로 해외에서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가고 원화로 환산한 기업 이익은 커지기 때문에 수출 기업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원화 약세로 평가 손실을 볼 우려가 커지면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과 채권을 팔고 나가기 때문에 금융 시장은 불안해진다. 또 국내 소비자들은 수입 제품 물가가 올라 생활비 부담이 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