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중앙은행장 인선은 변화보다 안정을 택했다. 왼쪽부터 이강 인민은행 총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사진 조선일보 DB, 블룸버그
한·중·일 중앙은행장 인선은 변화보다 안정을 택했다. 왼쪽부터 이강 인민은행 총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사진 조선일보 DB, 블룸버그

“청문회가 아니라 국회 업무보고를 보는 것 같았다.”

지난 2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열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지켜본 한 한국은행 직원의 관전평이다. 이번 정부 들어 장관급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여야(與野)는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이 총재에 대해서는 달리 브레이크를 거는 의원이 없었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청문회는 7시간 만에 끝났고, 이주열 총재는 44년 만에 연임에 성공한 한국은행 총재가 됐다.


韓·中·日 중앙은행장 인선, 변화보다 안정

한국은행 총재가 연임한 건 1974년 김성환 전 총재 이후로 처음이다. 당시는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의장을 맡지 않았다. 한국은행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은 이후로는 이 총재가 연임에 성공한 첫 사례다.

공교롭게도 최근 일본과 중국에서도 중앙은행 수장의 인사가 잇따라 있었다. 한국은행 총재가 44년 만에 연임된 것처럼 일본과 중국도 비슷한 선택을 했다.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일본 국회는 지난 16일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의 연임을 승인했다. 일본은행 총재가 연임하는 건 1961년 야마기와 마사미치 전 총재 이후 57년 만이다. 2013년 3월 취임한 구로다 총재는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성공적으로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실시해 소비를 살리고 엔화 약세를 이끌어 수출 기업의 실적 개선에도 성공했다.

연임을 택한 한국·일본과 달리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15년 만에 수장을 교체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기존 체제를 유지한 것과 다름없다. 중국 공산당 제13기 전국인민대회(전인대)는 지난 19일 새 인민은행 총재로 이강(易剛) 인민은행 부총재를 선출했다. 이강 신임 총재는 15년간 총재를 지낸 저우샤오촨(周小川) 전 총재의 후임이다.

이강 신임 총재는 1997년부터 인민은행에서 일해왔다. 통화정책국장, 국가외환관리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저우 전 총재를 도와 중국의 금융 개혁 업무를 맡았다. 블룸버그는 “내부 출신인 이강을 총재로 발탁한 건 정책의 연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인민은행이 한국은행이나 일본은행보다 독립성이 낮은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중국은 기준금리 결정 같은 통화정책을 인민은행이 아니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여기다 인민은행을 관리하는 국무원 금융안전발전위원회가 지난해 새로 출범했다. 시진핑의 경제 책사인 류허(劉鶴) 경제담당 부총리가 금융안전발전위원회 주임을 겸임하고 있다. 톰 오를릭 블룸버그인텔리전스 이코노미스트는 “이강 총재보다는 류허 부총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지난 2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고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높였다. 이번 금리 인상은 대부분의 전문가가 예상한 대로였다. 더 중요한 건 앞으로의 행보다. 이번에 새로 공개된 점도표(미 연준 위원들의 금리 전망을 점으로 나타낸 도표)에서 연준은 내년 기준금리 인상 횟수를 두 차례에서 세 차례로 상향 조정했다. 올해 기준금리 인상 횟수는 종전의 세 차례를 유지했지만, 네 차례 이상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연준 위원이 4명에서 7명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재닛 옐런 미 연준 의장은 1970년 이후 처음으로 연임에 실패했다. 사진 블룸버그
재닛 옐런 미 연준 의장은 1970년 이후 처음으로 연임에 실패했다. 사진 블룸버그

美 금리 인상 본격화…각국 과제 산적

가뜩이나 미국의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높아진 상황에서 인상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한국 금융시장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 당장은 한국 주식이나 채권시장에서 외국인이 투자금을 빼가지 않더라도 미국과의 금리 차이가 벌어지는 현상이 장기화되면 언제든 외국인 자금이 이탈할 수 있다.

일본은 물가가 문제다. 일본은행은 물가상승률 2%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0%대에 그치고 있다. 민진당 등 일본의 야당이 구로다 총재 연임에 반대표를 던진 것도 2% 물가상승률 목표 달성 실패 때문이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추가적인 금융완화를 통해 물가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와카타베 마사즈미(若田部昌澄) 와세다대 교수가 일본은행 부총재에 임명되는 등 구로다 총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이강 총재도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중국의 고질병인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위안화 국제화라는 새로운 과제도 주어졌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고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는 상황에서 해외 자본을 유치하는 것도 이강 총재가 해야 할 업무 중 하나다.


Plus Point

40년 만에 연임 실패한
미국 연준 의장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직에 있던 시절,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이 누구냐.’ 미국 대통령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지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답은 달랐다. 그는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안드레아 미첼 NBC 기자를 가리키며 “가장 센 사람과 결혼한 미첼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미첼의 남편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전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하는 달러화의 발행독점권을 가진 연준의 결정에 세계 경제의 향방이 정해진다고 봐도 된다. 이런 이유로 미국 연준 의장은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연임하는 게 관례였다. 연준 정책의 연속성을 지킨다는 의미와 함께 정치적인 중립성을 보장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관례를 무시하기로 정평이 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의 연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옐런 전 의장은 지난 2월 4년 단임으로 임기를 마쳤다. 옐런의 자리는 제롬 파월이 이어받았다. 연준 의장이 연임에 실패한 건 역사상 최악의 연준 의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윌리엄 밀러(1970년 사퇴) 이후 처음이었다. 옐런 전 의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재지명을 받지 못해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