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P2P 대출 관련 관계기관 합동 점검회의에서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P2P 대출 관련 관계기관 합동 점검회의에서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평소 재테크에 관심이 많던 대기업 직장인 A(38)씨는 부동산 PF 대출 상품에 투자하면 연 20%의 수익을 달성할 수 있다는 P2P(개인 간 거래) 대출업체의 광고를 접했다. A씨는 지인 중에도 P2P 대출 상품으로 돈을 번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투자를 결심했다. 투자금은 저금리(3~5%) 직장인 마이너스 통장에서 500만원을 대출받아 마련했다. 20%의 높은 수익률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불안한 마음에 매일 P2P 대출업체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A씨가 투자한 부동산 PF가 진행하는 건설 프로젝트가 착공조차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P2P 대출 시장이 빠르게 커지면서 A씨 같은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국내 P2P 누적 대출액은 5월 말 기준으로 3조5037억원을 기록했다. 1년 전 1조3000억원 수준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P2P 대출업체들이 높은 수익률을 내세워 투자자들을 모으고 있는데, 막상 투자 위험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A씨처럼 투자금을 날릴 위기에 처한 경우도 적지 않다.

P2P 대출업체가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고 파산해버리거나 업체 대표가 잠적해버리는 일도 있다. 투자자를 모집할 때 제시했던 투자설명서의 내용을 몰래 고치는 일도 다반사다. 

투자금을 돌려막기하다가 대규모 연체 사태를 초래한 ‘펀듀’라는 P2P 대출업체는 한때 P2P 대출 시장에서 3위까지 올랐던 회사다. P2P 대출 시장에서 ‘믿을 회사 하나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이유다.

국내 P2P 대출 시장이 개인 투자자의 지뢰밭이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핀테크(정보기술을 접목한 금융 서비스)의 선두주자로 불리던 P2P 대출이 어쩌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된 걸까. 해외에서는 P2P 대출이 은행을 보완하는 금융서비스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과 해외 P2P 대출 시장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P2P 대출은 2005년 영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영국에서 사업을 하던 자일스 앤드루스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불만이었다. 

앤드루스는 고민 끝에 돈이 필요한 사람과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을 직접 연결하는 서비스를 고안했다. 앤드루스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2005년 조파(ZOPA)라는 금융회사를 만들었다. 은행 같은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개인이나 기업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돈을 빌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조파의 탄생에서 볼 수 있듯이 P2P 대출은 기업금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해외에서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힘들거나 급전이 필요한 중소기업이 P2P 대출 플랫폼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 기업의 P2P 대출액은 2012년까지만 해도 1억파운드 수준이었는데 2016년에는 25억파운드(약 3조6000억원)까지 늘었다.

영국 정부도 중소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P2P 대출 시장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영국 최대 P2P 대출업체인 ‘펀딩클럽’은 영국 정부로부터 4000만파운드의 자금을 투자받았고, 다른 영국 P2P 대출업체도 중소기업 기업금융을 위한 자금을 영국 정부에서 투자받고 있다. 

P2P 대출의 창시자인 앤드루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P2P 대출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앤드루스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P2P 대출을 하는 ‘마켓인보이스’의 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온데크’ ‘렌딩클럽’ 같은 P2P 대출업체가 중소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P2P 대출을 이용하는 중소기업이 거의 없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 세 곳 중 두 곳은 P2P 대출이라는 개념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빠진 자리를 채우는 건 부동산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으로 국내 P2P 누적대출액에서 법인 신용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5.1%에 그쳤다. 대신 PF 대출(43.2%)과 부동산 담보대출(22.8%)이 차지하는 비율은 66%에 달했다. PF 대출의 대부분이 부동산 PF인 것을 감안하면 국내 P2P 대출 시장의 3분의 2가 부동산 관련 대출인 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부동산 PF나 부동산 담보대출 같은 부동산 관련 대출은 부동산 경기가 하락할 경우 투자자 피해가 우려되는 분야”라며 “특히 PF 대출의 부실률은 12.3%로 전체 P2P 대출 평균(6.4%)의 두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부실률은 대출 잔액 가운데 투자자에게 상환해야 할 돈을 90일 이상 연체한 경우를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 문제가 생기고 있는 P2P 대출업체 대부분이 부동산 PF 대출을 다루는 곳이다. 최근 부도가 난 ‘헤라펀딩’은 부동산 PF 전문 P2P 대출업체 가운데 중견급으로 평가받은 곳이다. 

최근 대표가 구속된 ‘아나리츠’도 부동산 PF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다. 한 P2P 대출 업체 관계자는 “부동산 관련 대출은 투자 위험성이나 담보물에 대한 평가 등 전문가가 신경써야 할 게 많은데 P2P 대출업체 중에 이런 분석 능력을 제대로 갖춘 곳은 손에 꼽힌다”고 지적했다. 

국내 P2P 대출업체의 평균 임직원 수는 10.5명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담보물의 가치나 대출 위험을 평가하는 심사인력은 업체당 평균 3.7명에 그친다.


정부도 P2P 대출 관리·감독 강화하기로

전문가들은 P2P 대출 시장이 발달한 영국이나 미국처럼 정부가 나서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P2P 대출 시장이 발달한 영국과 미국의 경우 정부가 대출업체들을 직접 규제하고 있다. 

영국에서 P2P 대출업을 하려면 최소 자본금 요건 등을 충족하고 금융행위감독청(FCA)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은 지방자치단체에 대부업 등록만 하면 영업을 할 수 있다. 

FCA는 투자자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P2P 대출업체의 재산과 개인투자자의 투자금을 별도로 관리하게끔 하고 있다. 또 미국은 P2P 대출 중개를 일종의 증권 거래로 보고 증권위원회(SEC) 차원에서 규제하고 있다.

이성복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P2P 대출 중개 플랫폼을 단순히 대출정보를 온라인에 중개하는 업체로만 보지 말고 미국이나 영국처럼 하나의 독립된 금융회사로 인정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투자자 보호를 위해 미국처럼 P2P 대출 상품을 자본시장법상 증권으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한발 늦었지만 투자자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4일 법무부·경찰청·금융감독원과 함께 ‘P2P 대출 관련 관계기관 합동 점검회의’를 개최하고 P2P 대출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P2P 시장에 진입제한이 없어 다양한 업체가 난립했고 기술력과 안전성을 갖춘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 간의 구분이 어려워졌다”며 “향후 입법을 통해 규율내용의 강제성을 확보해 거래질서를 안정시켜 나갈 수 있도록 제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