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사진 블룸버그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사진 블룸버그

6월 20일 평화로운 포르투갈 남서쪽 신트라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이 확전 양상을 보이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장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올해로 다섯 번째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연례 포럼에는 미국의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비롯해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필립 로우 호주중앙은행(RBA) 총재가 참석했다.  

“글로벌 무역갈등이 고조되면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에 나쁜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이날 참석한 모든 중앙은행 총재들은 한목소리로 글로벌 무역전쟁을 배격하는 듯한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촉발한 글로벌 무역전쟁이 각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미국산 제품에) 관세를 다시 올리면, 미국은 2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겠다”면서 미·중 무역전쟁 ‘맞불 대응’을 예고했다. 

유럽연합(EU)도 미국산 수입품에 28억유로의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다. 앞서 미 행정부가 철강·알루미늄 수입품에 10~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결정한 데 따른 대응이었다.


금리 인상 목소리 높인 ‘매파’ 파월 의장

이날 ECB 좌담회에서 가장 목소리가 컸던 쪽은 무역전쟁을 촉발한 당사국 미국이었다. 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은 “무역 정책 변화로 경제 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재계의 우려가 크다고 전했다. 

파월 의장은 “미국의 기업인들이 무역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더 많은 걱정을 표현하고 있다”면서 “재계 측에서 처음으로 투자나 고용을 연기하기로 하거나 의사 결정을 미뤘다는 사실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무역분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연준이 공격적으로 긴축에 나선 배경은 견조한 성장세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 때문인데, 향후 무역갈등 심화로 관세가 붙게 되면 물가 상승 압력이 강해진다. 소비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국 경제에는 좋지 않다. 

실제 연준이 최근 공개한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록을 보면 위원들은 2019년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를 2.1%로 예상했다. 이미 목표치(2%)를 웃도는 수준이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연준은 금리 조절을 통해 물가 상승 압력에 대응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긴축에 더 속도를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파월 의장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긴축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파월 의장은 “미국 경제 성장세가 탄탄하고 위험에 대한 전망이 균형을 이뤘다”면서 “지속적으로 완만한 금리 인상을 추진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들이 통화 정책에 대해 비교적 말을 아꼈던 것과 대비됐다.


드라기, 수출 타격 우려에 긴축 연기 시사

파월 의장에 앞서 발언을 시작한 드라기 ECB 총재도 무역갈등이 유로존 수출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매우 걱정스러운 수준이며, 그 어떤 낙관적인 부분도 찾을 수 없다”면서 “무역분쟁으로 유로존 19개국 경제에 엄청난 불확실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독일과 같은 대미 무역 흑자국들엔 무역전쟁이 악재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의 대미 무역 수지 흑자 규모는 약 500억유로로 2011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중에서 자동차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가깝다. 독일의 싱크탱크 Ifo는 25%의 자동차 관세가 부과되면 독일 전체 GDP에서 연간 50억유로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ECB는 유로존 경제 회복세가 둔화 중인 상황도 우려하고 있다.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유로존 경제 성장률은 0.4%로 2016년 3분기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드라기 총재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 금리 인상 시기가 다소 미뤄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지난 15일 단계적 긴축 계획을 발표한 지 불과 나흘 만에 발을 빼는 모양새가 됐다. 드라기 총재는 “필요할 경우 채권 매입 프로그램을 다시 가동하겠다”고 말했다.


日, 인플레이션 불안감에 나 홀로 완화 기조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일본의 물가 상승률 설명에 발언 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하루히코 총재는 “물가 상승률 목표인 2%를 달성하려면 임금 상승률이 3%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며 “물가가 예상만큼 오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은 인플레이션 불확실성이 출구전략의 발목을 잡고 있다. 4월 물가 상승률은 0.7%를 기록했다. 구로다 총재가 제시한 긴축의 전제 조건(물가 상승률 2%)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최근 일본은행은 온라인 쇼핑 증가로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0.1~0.2% 떨어졌다는 ‘다소 변명 섞인’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경기 회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점도 일본은행이 나 홀로 완화 기조를 유지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1분기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연율 기준 마이너스 0.6%를 기록했다. 분기 기준 마이너스 0.2%로 9분기 만에 위축됐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통화 정책이 당분간 미국, 유로존 등 선진국들의 긴축 기조와는 반대로 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5일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0.1%로 유지하는 결정을 내린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구로다 총재는 “지금으로서는 통화 정책을 검토할 계획이 없고 강력한 완화책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며 출구전략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Plus Point

무역전쟁, 선진국 금리 인상 기조에 신흥국 통화 불안 커지자 한국도 흔들

글로벌 무역전쟁이 가시화하면서 한국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이 1110원을 돌파하며 7개월 만에 최고치(원화 가치 하락)를 경신했다. 6월 2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7.7원 오른 1112.8원에 거래를 마쳤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1070원대에서 움직이던 것과 비교하면 3% 넘게 상승한 것이다. 증시도 외국인들의 매도세에 밀려 올 들어 처음 2340 선을 내줬다. 같은 날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1.10% 하락한 2337.83을 기록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달러화 가치가 오른 상황에서 신흥국 통화 불안이 커졌다. 여기에 한국 최대 교역 대상인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까지 겹치며 위험 자산 회피 심리가 생겼다. 김현진 NH선물 연구원은 “미·중 무역갈등으로 국제 교역량이 줄어들면 경제에서 수출 비중이 높은 아시아 통화는 약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이번 글로벌 무역전쟁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한국무역협회는 “미국과 중국, EU가 관세를 10%포인트씩 올리면 우리 수출은 367억달러 감소한다”고 전망했다. 이는 작년 수출의 6.4%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선뜻 금리 인상을 결정 짓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 6년 5개월 만에 처음 금리를 인상한 이후 사실상 긴축기에 들어섰다고 보는 시각이 많지만 물가 상승압력이 크지 않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최근에는 고용 부진과 글로벌 경기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1%대 중반 수준으로 인상속도를 늦추는 요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