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연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정 확대 정책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이유에 대해 “정책의 불확실성이 크고 다른 정책이 재정정책 효과를 상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버냉키 전 의장과 재닛 옐런 의장. <사진 : 블룸버그>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연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정 확대 정책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이유에 대해 “정책의 불확실성이 크고 다른 정책이 재정정책 효과를 상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버냉키 전 의장과 재닛 옐런 의장. <사진 : 블룸버그>

대규모 재정 투자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세계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기 부양에 대한 기대로 최근 미국 주가와 국채 금리, 달러 가치가 일제히 상승하는 등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였지만 연준은 기존 경제전망을 대체로 유지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2016년 12월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연준은 2017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기존 2.0%에서 2.1%로 소폭 올려 잡았고, 물가상승률 전망은 기존 1.8%를 유지했다.

오히려 연준은 “확장적 재정정책이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규모로 실시될지 매우 불확실하고, 총수요와 총공급에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새 행정부가 발표한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경제의 ‘상향 리스크(전망보다 경제가 더 빠르게 상승하는 것)’가 커져 금리를 더 빠른 속도로 올려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규모 재정 투입 프로그램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연준이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는 재정정책에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브루킹스연구소 상임연구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연준의 진단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정책 불확실성·자산가격 변화로 판단 신중

재정정책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연준은 재정이 총수요와 총공급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예상해 재정정책의 효과를 평가한다. 예를 들어 인프라에 대한 재정 지출이 증가하거나 세금 감면이 이뤄지면 소비가 늘어난다. 인센티브를 주는 조세 정책은 공급을 확대하기도 한다. 재정정책의 규모와 시행 시기, 정책이 시행되는 시점의 경제 상황도 정책 효과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연준은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해 정책의 경제적 효과를 추정하고 경제 전망을 내놓는다.

그런데 인프라 건설에 1조달러를 투입하겠다는 트럼프의 계획에는 시행 시기와 규모 등 구체적인 정보가 아직 없다. 버냉키 전 의장은 “연준 정책 결정자들은 시장이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정책 평가에 언제나 신중하게 접근한다”며 “트럼프의 정책 계획은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연준이 기존 경제 전망을 유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냉키 전 의장은 재정 확대 정책이 시행되기까지 정치적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도 지적했다. 공화당이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 적자 확대가 예상되는 대규모 재정 확대 프로그램이 트럼프의 계획대로 시행될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재정 확대와 함께 법인세와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를 인하하겠다고 약속했다. 써야 할 돈은 늘어나는데 세수(稅收)는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이 계획이 그대로 시행되면 미국 재정 적자는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버냉키 전 의장은 “재정 확대 프로그램이 언제 의회를 통과할지 알 수 없고, 그 규모도 줄어들 수 있다”며 “또 재정 확대 계획이 의회 문턱을 넘어도 실제로 인프라 투자가 이뤄지려면 수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연준이 트럼프 재정정책의 효과를 추정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버냉키 전 의장은 무역 규제 강화 등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겠다고 한 다른 경제정책이 재정 확대에 따른 경기 부양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행정부가 들어서면 재정정책뿐 아니라 다른 경제정책 분야에도 큰 변화가 야기된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로 재정 확대와 함께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무역 장벽 강화 등 다양한 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미국 인디애나주 교량 건설 현장의 모습.
미국 인디애나주 교량 건설 현장의 모습.

버냉키 “3~4년 전보다 재정 확대 필요 줄어”

버냉키 전 의장은 “규제 완화는 기업 활동을 촉진하고 시장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으로 보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며 “특히 무역 장벽을 강화하려는 트럼프의 움직임에 대해 많은 기업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무역장벽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만으로 이웃 국가 멕시코의 주가와 페소화 가치가 크게 하락했는데 이는 미국 경제에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줄 수 있다. 트럼프는 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핵심 정책 ‘오바마 케어(건강보험 개혁법)’를 사실상 폐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 이 결정에 따라서도 반사 이익을 얻는 기업과 손해를 보는 기업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새로운 정책들이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가늠하기 어려운 셈이다.

국채 금리와 달러 등 크게 움직인 자산 가격 변화가 재정정책의 효과를 제한하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는 게 버냉키 전 의장의 설명이다. 게다가 금융시장은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일제히 상승했던 미국 주가와 금리, 달러 가치는 최근 트럼프가 반(反)이민정책과 무역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버냉키 전 의장은 “다른 조건이 동일한 상황에서 장기 금리가 상승하면 주택 건설과 기업 투자가 감소할 것”이라며 “이런 경우 재정을 투입해도 경기 부양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달러 강세는 미국 기업의 수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해외 시장에서 미국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버냉키 전 의장은 미국 경제가 위기를 벗어난 상황에서 트럼프식 대규모 재정정책이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2006~2014년 연준을 이끌었던 버냉키 전 의장은 “내가 의장이었던 당시 미국 경제는 높은 실업률에 신음했고, 통화정책 여력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고용을 창출하고 수요를 늘리기 위해 재정의 역할이 필요했지만, 지금 미국 경제는 완전 고용에 근접하고 있다”며 “수요를 촉진하기 위한 재정의 역할 요구가 3~4년 전보다 낮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버냉키와 논쟁을 벌였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도 같은 진단을 내놓고 있다. 미국 경제의 구조적 장기침체론을 주장하는 서머스 교수는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 확대 정책을 주장하는 학자이지만, 트럼프의 정책에 대해서는 “재정 적자를 키워 오히려 경제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버냉키 전 의장은 “지금 경제 상황에서 물가 상승 압력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경제 성과를 높이려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경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개선하고, 개인의 자본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세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