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KEB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한 직원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 블룸버그

정부세종청사 4동 4층은 한국 정부 외환 관리의 중추다. 한국 경제 정책의 방향키를 잡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통째로 쓰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4층에는 외환 정책을 담당하는 국제금융국 외화자금과가 자리하고 있다. 외화자금과 사무실 한쪽에 작은 방이 있다. 정부청사의 여러 사무실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기자들에게도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공간, 바로 딜링룸(dealing room)이다.

딜링룸은 보통 증권사나 은행 같은 금융회사의 매매·거래 전용 사무실을 말한다. 그런데 정부청사 안에 왜 딜링룸이 있는 걸까. 외화자금과의 딜링룸 풍경은 여느 금융회사의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는 세계 주요 통화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보이고, 한국 외환시장의 흐름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건 딜링룸의 역할이다.

외화자금과에서 딜링룸을 전담하는 직원들은 환율의 움직임을 초(秒) 단위로 챙긴다. 외환시장이 갑자기 요동쳐서 한국 경제에 피해가 예상될 때, 정부는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을 활용해 달러를 매도하거나 매수하는 개입에 나선다. 금융회사의 딜링룸이 기업이나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면, 외화자금과의 딜링룸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그런데 최근 이 감시초소가 등화관제(燈火管制)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미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원화 환율)이 하락하는 데도(원화 강세), 정부의 시장 개입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초 1090원대였던 원화 환율은 4월 초 한때 1050원대까지 떨어졌다. 원화 환율이 연저점은 물론이거니와 연일 2014년 이후 최저치를 돌파하며 떨어지는데도 외화자금과 딜링룸의 전화기는 조용했다는 말이 외환시장에 돌았다.

원화 환율이 하락하면 수출 기업은 같은 물건을 팔아도 원화로 버는 돈이 줄어들어서 손해다. 한국 경제는 수출 산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환율 하락 속도를 조절하는 건 외환 관리의 핵심인데도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외환시장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미국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2017년 11월과 올해 1월, 원화 강세를 완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

4월 13일 미국 재무부는 ‘환율보고서’를 통해 한국을 환율조작 관찰 대상국으로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재무부는 매년 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주요 교역국의 외환 정책을 평가한다. 이 보고서에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미국 기업의 투자가 끊기고 해당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이 어려워지는 등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미 교역촉진법에 따르면 △연간 대미 무역흑자액 200억달러 이상 △GDP 대비 연간 경상흑자 비율 3% 이상 △GDP 대비 외환시장 개입 비율 2% 이상 등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 환율조작국에 지정된다. 한국은 GDP 대비 외환시장 개입(한국 정부가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를 순매수한 금액) 비율이 2%를 넘지 않아 환율조작국 지정을 피했다. 하지만 한국도 1988년 4월부터 1989년 10월까지 1년 반에 걸쳐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됐다가 대미 무역수지가 빠르게 적자로 전환하는 등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다행히 이번 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은 환율조작국 지정을 피했지만, 좋지 않은 끝맛을 남겼다. 환율보고서는 한국 거시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이 견조한 것을 감안하면 2010년 이후 원화 가치가 저평가된 것(원화 약세)으로 보인다며 외환시장 개입 정보 공개를 신속하게 시행하라고 권고했다.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지 않으면 추후에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압박이었다.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으면 오는 10월에는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될 위험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원화가 글로벌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를 미뤄왔다. 한국 정부가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 규모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지를 알게 되면 헤지펀드 등 국제 투기세력이 이런 정보를 역으로 이용해 한국 외환시장을 투기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국가가 거의 없고, 한국의 주요 교역 상대인 미국 정부가 더 이상 이 문제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한국 정부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는 것보다 환율조작국에 지정됐을 때의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3개월마다 순매수 규모만 공개할 듯

지난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는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를 놓고 물밑 협상이 이뤄졌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부 장관을 잇따라 만나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 방법과 시기 등을 논의했다. 김 부총리는 4월 21일 워싱턴 현지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처럼 성숙한 경제와 외환시장을 가진 나라라면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며 “점진적으로 공개하면서 시장에 잘 적응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은 건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이다. 정부는 이르면 5월부터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일단은 3개월에 한 번씩 외환 순매수 규모만 공개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재무부는 매달 외환 매수·매도 총액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김 부총리가 점진적인 방식을 택하겠다고 한 만큼 당장 매수·매도 총액을 공개할 가능성은 적다. 순매수 규모만 공개하면 구체적인 매수·매도액은 확인이 불가능한 만큼 투기 세력이 악용할 여지도 줄어든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매수·매도 총액까지 공개하는 게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 TPP 회원국들이 체결한 공동선언문에는 3개월에 한 번씩 외환 매수·매도 총액을 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영화 교보증권 연구원은 “정부의 개입 내역은 매달 발표되는 외환 보유액 자료로도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며 “단기적인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에 대한 부담 때문에 환율을 방치하면 원화 환율 하락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국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원화의 실질가치가 1% 오르면 수출 물량은 0.12% 감소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인 전기·전자, 운송장비가 받는 타격이 크다. 그동안 원화 가치를 낮추는 요인이었던 북한 리스크가 축소되면서 원화 환율이 하락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정부의 개입이 불가능해지면서 환율 변동성이 커질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