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신업체 AT&T가 미디어·콘텐츠 업체 타임워너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인수가 이뤄지면 AT&T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진 : 블룸버그>
미국 통신업체 AT&T가 미디어·콘텐츠 업체 타임워너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인수가 이뤄지면 AT&T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진 : 블룸버그>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올해 초 일제히 미국 식품업체 시스코(Sysco)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시스코가 유럽 식품서비스업체 브레이크스그룹(Brakes Group)을 31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다. 무디스와 S&P는 “시스코가 브레이크스 인수를 시작으로 유럽 식품업체 인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데, 부채를 활용한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이 이어진다면 시스코의 신용 위험이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메가딜(mega deal)’로 주목받은 미국 2위 통신사 AT&T와 타임워너의 M&A에 대한 평가도 비슷하다. 무디스와 S&P는 “AT&T가 타임워너를 인수하면 AT&T는 매년 100억달러에 가까운 부채를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부채 부담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M&A가 성사될 경우 AT&T의 신용등급을 낮출 것”이라고 경고했다.


M&A 규모 사상 최대

저금리 환경에서 수익성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이 공격적인 M&A에 나서는 가운데 기업 부채가 함께 증가하며 이에 대한 경고음도 커지고 있다. 기업 부채가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는 지적이다. 무분별한 M&A로 기업 부채가 늘어나면 기업 건전성이 악화되고 이에 따라 신용등급이 낮아지면 기업이 자금을 빌릴 때 드는 비용이 늘어난다. 많은 기업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금융시장과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금융시장 리서치업체 딜로직(Dealogic)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M&A 규모는 4조7000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10월까지 발표된 M&A 규모는 3조2900억달러로, 미국에서 발표된 M&A만 1조5500억달러에 이른다. 이 중 지난 10월은 최근 10년 동안 M&A 시장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다. AT&T가 타임워너를 857억달러에 인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GM은 석유서비스업체 베이커휴즈 인수를 위해 320억달러를 쓰겠다고 했다. 퀄컴은 NXP반도체를 392억달러에 인수하고 담배회사 BAT는 469억달러에 미국 담배제조업체인 레이놀즈 지분을 인수하겠다고 했다.

M&A 시장이 크게 달아오른 원인은 여러 가지다. 가장 큰 원인은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에 머무르며 시중 자금이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이 이미 막대한 현금을 쥐고 있다. 와튼스쿨의 에밀리 펠드만 교수는 “과거 급증했던 기업의 자사주 매입이 감소하는 가운데 기업이 남아도는 자금을 사용할 대안처를 찾기 시작했고, M&A가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저성장 기조에서 기업의 수익성 저하 역시 M&A 시장을 달군 주요 원인이다. 많은 기업들이 생산 비용을 줄여 수익을 높이기 위한 자구책으로 M&A에 나서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12월 14일 1년 만에 금리를 인상하면서 M&A 열기가 다소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금리 인상 전망에도 M&A 계획이 발표됐기 때문에 당분간 M&A 시장의 활황은 이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급증한 M&A가 기업 부채를 과도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S&P는 “많은 기업이 매출을 늘리기 위해 M&A에 나섰고, 이를 위해 빚을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맥킨지와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투자적격 등급 기업의 레버리지 비율(수익 대비 부채 비율)은 미국 부동산 버블 사태가 발생한 2002년(2.4) 이후 올해 6월 최고치(2.4)를 기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직후인 2009년(2.3)보다 높다. 이 비율은 지난 2010년 1.7까지 떨어졌었다.


합병 기업 재무구조 위험 수준

M&A 증가로 인해 기업이 부담해야 할 부채가 증가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는 이미 지난해부터 나왔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폭주 수준인 M&A 증가 속도는 미국 기업의 재무 위험성을 확대시키고 있다”며 “부채로 M&A에 나선 많은 기업의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위험 가능성을 인지한 금융기관은 벌써 돈줄 조이기에 나섰다. 크레디트스위스와 제프리스그룹, 웰스파고 등 월스트리트 주요 투자은행들은 올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이 요구하는 인수 자금 대출을 거부했다. 대출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부 기업은 리스크 관리에 나서고 있다. 세계 M&A ‘큰손’으로 불리던 중국 푸싱(福星)그룹은 앞으로 부동산·채권·주식 등 400억위안(약 6조8000억원) 규모의 자산을 매각해 기업 신용등급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푸싱그룹은 금융·제약·철강·호텔 등 세계 기업을 빠르게 인수하며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하지만 S&P 등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이 푸싱그룹의 무리한 M&A로 부채가 위험 수준까지 확대됐다며, 푸싱그룹의 신용등급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자 기업 재무 구조 개선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부채 수준이 곧 금융위기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금융사 반센(Bahnsen)그룹의 데이비드 반센 최고투자책임자는 기업 레버리지비율이 늘어난 상황에 대해 “빨간불이 켜진 정도는 아니지만 (경고를 의미하는) 노란불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Plus Point

최고 신용등급 美 기업 2개뿐

미국 기업 중 최고신용등급인 AAA(S&P 기준)를 보유한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존슨앤드존슨 2곳뿐이다. 1990년대 S&P로부터 AAA 등급을 받은 기업이 100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미국 기업의 신용등급이 크게 낮아진 셈이다. 미국 기업의 신용등급이 낮아진 이유는 저성장으로 수익성이 저하된 상황에서 기업들이 M&A에 나서며 부채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이 수는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MS 역시 올해 인맥관리업체 링크드인 M&A 계획을 밝혔기 때문이다. S&P는 MS가 보유한 현금으로 충분히 인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평가했지만, 무디스는 MS 신용등급 장기 전망을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