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2월 하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금리동결을 결정했다. <사진 : 연합뉴스>
한국은행은 2월 하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금리동결을 결정했다. <사진 :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지난해 6월 이후 연 1.25%의 기준금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금리를 추가로 내릴 경우 얻을 수 있는 경기 부양 효과는 적고, 반대로 올리면 가뜩이나 취약한 내수 경기가 확 꺼질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은의 신중함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한은이 처해 있는 딜레마 속에서 정책 수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지난해 6월 금리 인하가 효과가 있었다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내수는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극심한 내수 불황은 ‘유동성 함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정도다. 도리어 내수 부진 속에서 금리 인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사건은 늘어나고 있다. 먼저 물가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부동산 매입 자금을 중심으로 가계 대출도 가파르게 늘었다. 경기 침체 속에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비롯해 일본·독일 등 대미 무역 흑자가 많은 나라를 겨냥해 환율 조작국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기준금리 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달 말 한국은행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는 한은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날 업무보고에서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은 “한은이 나서주십사 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금리 인상을 미국이 하더라도 곧 올리지 않겠다는 뉘앙스로 메시지를 만들어달라는 것. 둘째 물가상승률이 안정되도록 금리를 운영해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유동성 함정과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상반된 현상 속에서 한은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실질 기준금리는 이미 마이너스 상태

한은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기준금리를 내려도 내수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리가 내려가면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감소하고 주택, 자동차 등 빚을 지고 사야 하는 상품 구입이 늘어난다. 또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수출에 유리하다. 하지만 6월 금리 인하로 투자와 소비가 늘었다는 분석은 나오지 않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구매력 위축은 고용 시장 불안에 따른 소득 감소, 가계부채 부담 등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며 “빠르게 회복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금리를 내려도 투자와 고용이 늘어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해외 투자은행(IB)이 한은이 올해 하반기 이후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것은 0.25% 정도의 금리 인하로는 경기 부양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아예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10월 이후 한국이 기준금리 인하로는 도저히 투자와 소비를 자극할 수 없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것으로 주장했다. 모건스탠리는 “6월 금리 인하 이후 경제 지표를 분석하면 한국의 실질 중립이자율(neutral real policy rate·완전고용 상태에서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을 때 금리 수준)은 0~0.5% 수준”이라며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2016년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계속될 경우 양적완화 등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일 모건스탠리는 기존 예상을 철회하긴 했지만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와 그로 인한 통화정책 효과 저하 문제는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때문에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인플레이션은 한은 입장에서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높아지면서 1월 실질 기준금리(명목 기준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차감해 구한 금리)는 -0.78%로 떨어졌다. 한은의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1.8%)를 기준으로 보면 현재 기준금리는 -0.65% 정도다. 한은이 실질 기준금리를 장기간 마이너스 상태로 놓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9년 만이다.


日 제로금리 정책 공격하는 트럼프… 한국은?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도 당장은 한은에 호재다. 글로벌 기준금리나 마찬가지인 미국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한국의 기준금리는 상대적으로 인하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은이 유지하는 사실상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물가를 자극하고 가계부채를 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25일 금융통화정책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하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가계 부채 증가 문제에 대해 “가계 부채가 (부동산 가격 폭락과 대규모 은행 부실 등) 체계적 위험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간담회장 밖에서는 “시스템 리스크는 없지만 총량은 분명히 문제”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대미 흑자국을 상대로 환율 문제를 이슈화하면서 한은은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논리는 한국·일본 등이 기준금리를 계속 낮추면서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을 유도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아사카와 마사쓰구(淺川雅嗣) 재무관(국제담당차관)이 지난달 7일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미국 국제경제 정책 분야의 실세인 케네스 저스터 국가경제위원회(NEC) 부위원장에게 일본은행의 제로금리 정책에 대한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한은이 계속해서 현 기준금리를 유지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하지만 현재 한은의 정책 스탠스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현상 유지가 한은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지난해 금리 인하가 효과가 없었던 이유는 한은이 기준금리 변동을 원치 않지만 마지못해 소폭 내린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라며 “통화정책이 효과를 보려면 기준금리 변경이 단기 금리를 거쳐 장기 금리까지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여기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 교수는 “아주 과감한 금리 인하가 아니면 한은이 현 상황에 ‘락인(lock-in·갇혀 있는)’된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는 “한은의 핵심 문제는 왜 물가상승률 연 2% 목표를 유지해야 하는지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동의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물가 목표가 연 4%대의 인플레이션이면 왜 안 되는지 설명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은의 통화 정책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떤 기조를 취해야 하는지 사회적인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