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행 김정태(金正泰) 전 행장은 10월 말 퇴임을 앞두고 바쁜 생활을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7시까지 정신없이 업무를 보고, 퇴근 후에는 직원들과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10월6일에는 국민은행노조·주택은행노조·국민카드노조 등 국민은행 산하 3개 노조의 전현직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자신의 손으로 은행과 카드사의 통합은 이뤄냈지만, 3대 노조의 통합은 아직 이뤄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김정태 전 행장은 지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격동했던 한국 금융계가 낳은 풍운아다. 우량 은행인 옛 국민은행과 옛 주택은행을 합병해 국내 최대 우량 은행인 통합 국민은행을 만들어 냈고, 초대 사령탑을 맡았다.

 김 전 행장은 취임 후 ‘장사꾼 은행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주 가치의 극대화를 선언하며 이익을 내는 데 주력했다. 장사에 방해가 되면 정부를 향해서도 ‘No’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경영철학은 고객 만족·투명 경영·성과주의 등 평소 우리가 주변의 경영자나 경영학 서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낯익은 용어들이다. 다만 그는 다른 경영자와 달리 이러한 철학을 실천한 ‘행동가’였다.



 권위주의 문화 실용주의로 바꿔

 김 전 행장은 인사 청탁을 하는 행원에게는 불이익을 줬고, 임직원들이 현장에 나가 고객에게 머리를 숙이도록 지시했다. 관리자들은 영업 일선에 전진 배치됐고, 의사 결정 절차와 소요 시간은 과거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다. 2002년에는 은행업계에서 ‘노인정’으로 불리던 부행장의 40%를 40대에서 발탁했다. 외부 전문가는 국민은행에서 우대받았다. 정부투자은행 시절의 쾨쾨한 권위주의 냄새를 실용주의 문화로 바꾸는 대작업을 짧은 기간에 쉽게 해냈다.

 국민은행은 김 전 행장이 취임한 1998년 2900억원의 적자를 냈으나 이후 4년간 4500억~1조300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카드 사태로 7500억원의 적자를 보았지만, 올해 1분기에 다시 1500억원의 흑자로 돌아섰고, 올들어 9월까지 모두 6000억원 정도의 흑자를 낸 것으로 증권업계에서는 추정한다.

 이러한 실적 때문에 김 전 행장에 대한 평가는 국내 수준을 능가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세계 금융계의 영웅’이라고 칭했고, 비즈니스위크와 포브스는 ‘그의 경영 혁신 방식은 아시아의 모델’, ‘아시아  금융계의 가장 밝은 희망’이라고 치켜세웠다.

 김 전 행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복잡한 회계 문제 때문이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지난 10월10일 정례 회의를 열고 국민은행이 지난 2003년 9월에 국민카드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5500억원 규모의 회계를 기준에 어긋나게 처리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금융감독위원회의 내부 규정상 ‘중과실 3단계’에 해당하는 잘못이다. 이 징계 조치로 김 전 행장은 10월31일 현직 임기를 마치면서 향후 3년간 은행 취업이 금지됐고 결국 연임이 좌절됐다. 김 전 행장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윤종규(尹鍾圭) 부행장도 이번 사태의 책임 때문에 중징계를 받으면서 국민은행장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다.



 경영자는 숫자로 말한다

 김정태 전 행장에 대한 징계는 처음부터 금융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내 금융계를 대표하는 최대 은행의 수장이 물러나야 할 정도로 회계 기준의 위반 정도가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는 주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제재의 첫 시발점인 금감원 내 감리위원회에서 제공했다. 국내의 저명한 회계 전문가들의 모임인 감리위원회는 전례 없이 회의를 한 차례 연기하는 진통까지 겪으면서 ‘회계 기준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나 중징계를 할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회계 전문가들의 이 의견은 이후 진행된 증권선물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의 징계 과정에 크게 반영되지 못했다.

 금융감독 당국과 국민은행간의 힘겨루기 싸움은 장외로 번지면서 금융계에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감독 당국은 자신의 결정을 고수했다. 김 전 행장은 물러나야 했다. 공방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금융감독원은 내부 규정 때문에 공개하지 않아왔던 검사 관련 문건을 이례적으로 자진 공개하면서 “국민은행이 회계 기준을 위반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김중회 금융감독원 부원장).

 김정태 전 행장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회계 처리를 하기 이전에 회계법인·법무법인·국세청 등에 자문해 모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아직도 회계 처리는 잘못이 없다고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전 행장은 “대통령도 지난 6월 금융기관장 청와대 오찬모임에서 위기 관리 과정에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선의를 갖고 내린 판단 등 허용될 수 있는 오류는 면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까지 거론했으나 그의 이 발언은 감독 당국자들을 더욱 불쾌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제3의 유력 인사들도 편이 갈렸다. 이헌재(李憲宰) 경제부총리는 한 간담회에서 “선도 은행 최고경영자들이 (LG사태 때 보인) 리더십 부재, 제왕적 경영, 준법 자세에 문제가 있다”며 간접적으로 김 행장을 비판했다. 반면 김태동(金泰東) 금융통화위원은 한 라디오 시사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금융감독원의 징계 조치는 시장경제에 조종(弔鐘)을 울린 관치금융”이라며 금융감독 당국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연임 불가 방침이 확정되면서 김 전 행장은 깨끗이 물러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일체의 불복 소송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 전 행장은 지난 10월1일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30분간 진행된 마지막 월례 조회에서 시종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은행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태산 같지만, 한강에 매일매일 새로운 물이 흘러가듯 흐르는 강물 같은 심정으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날 생각입니다.”

 경영자는 숫자로 말한다는 철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래서 이날 김 행장은 “아직 3분기(7~9월) 실적이 나오지 않았지만 상반기(1~6월) 전체(3076억원)에 버금가는 순이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돼 마음이 한결 가볍다”고 했다. 국민은행의 2004년 실적은 저조하지만 2005년에는 대폭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모건스탠리)은 그의 아쉬움을 상당히 덜어주었으리라.

 김 전 행장은 아직 퇴임 후 구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인들은 그가 평소 ‘농사꾼’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농장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휴식도 취하고, 책도 보면서 소일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친구들을 주말마다 농장에 초청해 ‘한국 고유의 전통음식’을 즐기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생활 패턴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김기훈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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