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불렸던 IMF 환란 이후 국내 은행들은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정부 주도의 인수 합병을 통해 덩치 불리기에 성공하고 나서 더 이상 대항마가 없는 독주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돈 장사의 기본인 자산 규모만 비교해 봐도 은행권의 급성장은 여실히 드러난다. 국내 금융권의 총자산 규모는 환란 직전인 1997년 1491조 원에서 2004년 6월 말 1937조 원으로 30% 가까이 증가했다.

 이 중 은행권은 1997년 573조 원에서 1135조 원으로 두 배 가까운 증가세를 기록한 반면, 비은행 금융회사들은 918조 원에서 801조 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이처럼 장사 밑천이 딸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업점 수나 직원 수에서도 비은행 금융회사들은 속된 말로 ‘게임이 안 된다’.

 지난 1997년 1만5844개에 달했던 보험 대리점은 지난해 말 6962개로 56.1%가 줄어든 반면, 은행 점포는 97년 말 5987개에서 지난해 말 6488개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형 은행들이 ‘수익원 다각화’라는 깃발을 내걸고 이업종 금융시장의 공략에 나서면서 비은행 금융사들은 은행권의 독식에 ‘고사 위기’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은행, 금융 백화점으로 변신

 은행 자회사의 약진이 눈부시다. 은행들은 증권, 보험에 이어 자산 운용 부문과 캐피털 등 소규모 금융기관까지 자회사 확대를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국민은행이 한일생명을 인수해 KB생명으로 탈바꿈시켜 자회사로 편입시킨 데 이어 신한, 하나 모두 생명보험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새로이 편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압도적인 영업망과 역마진을 무릅쓴 고금리 상품을 내걸고 시장 공략에 나선 KB생명은 출범 6개월 만에 방카슈랑스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잠식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증권업계의 빅3 중 하나였던 LG투자증권은 우리금융지주회사로 넘어갔다.

 하나은행은 코오롱캐피탈을 사들인 데 이어 대한투자증권 인수 작업을 진행 중이며, 신한금융지주는 최근 굿모닝신한증권의 잔여 지분을 모두 인수해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켰고 곧 신한생명도 지주회사 체제 내에 흡수할 예정이다.

 국민.우리.하나.신한 빅4 은행 외에 중소은행들 역시 타 업종 진출 시기를 가늠하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

 일례로 제일은행 코헨 행장은 “마땅한 매물만 있으며 언제든 카드사를 인수할 의사가 있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국민은행 정진섭 차장은 “종합병원에서도 내과겳丙杏릿募?치과나 성형외과가 수익 창출력이 한참 앞서기 마련”이라며 “은행 또한 기본이 되는 여수신 외에 보다 수익성이 높은 증권, 보험, 카드 등 부업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보험업계, 방카슈랑스 확대로 뿌리마저 흔들 

 금융정책의 은행 편중 논란을 불러일으킨 진원지는 은행에서 보험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한 방카슈랑스제도의 도입이다.

 방카슈랑스가 보험업계에 가져온 파장은 당초 예상을 넘어서고 있다.

 일례로 전체 23개 생명보험회사 중 방카슈랑스 판매에 참여한 14개사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9개월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8%가 증가한 보험료 판매 수입을 올린 반면 불참한 9개사는 31.8%가 감소했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7월 말까지 11개월 동안 총 43만 건에 보험료 수입만 3200억 원에 달했으며 이 중 판매의 95%를 은행이 점유했다.

 특히 국민.우리.하나.신한 4대 대형 은행의 점유율이 68.3%에 달하면서 이들 은행과의 제휴 체결 여부가 시장 판도마저 뒤흔들고 있다.

 조흥은행 조이수 시너지영업부장은 “중소사와 자회사 위주의 상품 판매가 이뤄지면서 보험업계의 판도 변화가 이뤄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내년 4월부터 시행될 보장성보험과 자동차보험의 2차 판매 확대가 가져올 여파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충격은 폭풍 전야의 가랑비 수준이라는 것이 보험업계의 위기감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판매된 저축성, 연금보험에 비해 보장성보험은 사업비 비중이 평균 30%에 이를 정도로 높아 보험료 인하 여지가 충분하다. 이에 판매 비용 부담이 적은 은행권이 가격 인하에 나설 경우 급격한 시장 잠식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미 시중 은행들은 2차 판매 시점부터는 보험료를 대폭 인하해 고객 기반을 넓혀 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조이수 부장은 “보장성보험의 예정 사업비 규모는 1차 판매 대상이던 연금겴餉善볶맨瓦?비해 워낙 커 판매 수수료 인하 여지가 충분하다”며 “방카슈랑스 도입 취지인 보험료 인하 효과 구현을 위해서라도 보험료를 대폭 인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보험업계에서는 가격 경쟁에 밀려 설계사 조직이 무너질 경우 판매망을 대체한 대형 은행에 끌려가는 종속화 현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생명보험협회 강성규 팀장은 “지난해 9월 이후 판매된 보험 상품의 69%가 은행 창구를 통해 나갔다”며 “보험사 판매망 붕괴는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이에 보험업계에서는 중소은행들까지 자회사를 설립해 시장 잠식에 나설 경우 방카슈랑스에 참여하지 않은 중소보험사들은 유동성 위기에 이은 보험료 지급 불능 사태에 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증권사 줄줄이 은행 자회사 편입

 LG투자증권에 이어 대한투자증권 등 업계 수위의 증권사들이 속속 은행권에 매각되거나 매각 협상이 진행되면서 증권업계의 위기감 또한 고조되고 있다.

 삼성증권의 스타 CEO로 주가를 올리다 공개 모집을 통해 올해 초 우리금융회장 겸 우리은행 행장으로 자리를 옮긴 황영기 회장은 취임 6개월여 만에 LG투자증권 인수를 성공시키며 증권업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황 회장은 최근 직원들과 가진 월례 조회에서 그동안 우리금융그룹이 복합 금융서비스를 강조해 왔지만 실제로는 은행 부문의 비중이 자산의 90%, 수익의 96%를 차지하는 은행그룹에 그쳤으나  LG증권 인수로 종합 금융그룹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특히 영업 수익의 상당 부분을 비이자 부문에서 창출할 것이라며 LG증권을 바탕으로 한 자산 관리 등 제2금융업 진출에 대한 포부를 내비치기도 했다.

 국민은행 역시 적극적으로 자산 관리 부문에 대한 진출을 진행 중이다.

 당초 적극적인 증권사 인수를 추진했던 국민은행은 최근 자회사인 KB자산운용과 제휴 증권사의 상품을 골라 파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PB/Asset Management 그룹을 맡고 있는 국민은행 정연근 부행장은 “반드시 증권사를 인수할 필요는 없다는 게 솔직한 판단”이라며 “수많은 증권사에서 만들어낸 상품 중 은행 고객의 구미에 맞는 것들만 골라 적정한 수수료를 받고 판매한다면 리스크 부담 없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업계, 은행계 역전… 카드업계 지각 변동

 카드사는 크게 삼성, LG, 현대, 롯데 등 재벌 기업들이 주축이 된 전 업계와 BC카드를 주축으로 한 국민, 외환 등의 은행계 카드로 분류된다.

 그동안은 마케팅 능력에서 한발 앞서는 전 업계 카드사가 시장을 리드하는 상황이었으나 지난해  신용카드 대란 이후 업계 2위의 LG카드가 산업은행 자회사로 편입되는 수모를 겪으며 이제는 자금력에서 앞서는 은행계 카드가 시장을 주도해 나가는 분위기다.

 특히 지난해 신용카드 대란 이후 전 업계 카드사의 대표격인 삼성카드와 LG카드의 추락은 충격적인 수준이다.

 LG카드의 올해 9월 말 현재 총 이용 실적은 38조8304억 원에 그쳐 지난해 같은 기간의 88조8000억 원보다 50조 원 가량이 줄어들었다. 삼성카드 역시 올해 9월 말까지의 이용 실적이 35조2000억 원에 그쳐 지난해 같은 기간의 74조178억 원보다 무려 52.4%가 감소했다.

 지난해 국민은행에 흡수된 KB카드 역시 감소세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은행측의 마케팅 지원에 힘입어 지난해보다 28.9% 줄어든 48조2300억 원을 기록하며 비교적 양호한 성적을 거뒀다.

 아울러 우리, 조흥 등 신용 대란 여파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은행계 카드들은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다시 공격적인 시장 확대를 모색 중이다.

 지난해 1조3200억 원의 대규모 적자를 내고 우리금융지주회사 전체의 실적을 아래로 끌어내렸던  우리카드는 우리은행에 흡수 합병된 이후 지속적인 구조 조정에 힘입어 9월 말 현재 5개월째 흑자를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다.

 아울러 매각의 불씨가 되기도 했던 조흥은행 카드 또한 최근에는 호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흥은행은 8월 말 100억 원의 순이익을 올린 데 이어 9월에도 흑자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조흥은행은 상반기에 기록한 적자 부담으로 연말 흑자 전환은 어렵겠지만 수익성 개선에 힘입어 실적이 대폭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한미은행 인수를 마무리지어 가는 씨티그룹이나 뉴브리지에 매각된 제일은행 등 소위 ‘외국계 시중 은행’은 여전히 카드사 인수에 대한 희망을 내비치고 있어 또 다른 판도 변화를 불러올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은행의 제2금융 시장 진출에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광범위한 지점망과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 능력이 기존 제2금융 회사들의 경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덕분에 마케팅 능력이나 자금력에서 밀리는 제2금융 회사들은 줄줄이 문을 닫거나 경쟁사나 또 다른 은행에 매각되는 악순환도 우려된다.

 아울러 ‘자금 공급’ 또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제2금융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산 건전성을 요구받고 있는데다 지난 IMF 외환 위기 당시 거래 기업의 부도로 퇴출 위기에 몰렸던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이헌재 부총리를 비롯한 현 경제팀은 금융산업을 은행 위주로 가져가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최근 이헌재 부총리는 국정 감사에서 은행 위주의 금융정책이 보험 등 비은행 금융회사들을 고사 상태로 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우선적으로 방카슈랑스 2차 확대의 연기를 요구하는 의원들에게 맞서 “아직 국내 은행의 경쟁력은 국제 기준으로 볼 때 취약한 수준”이라며 은행 중심의 금융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국내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의 대형화와 겸업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이헌재 부총리가 금감위원장을 지내며 은행권의 구조 조정을 이끌던 시절부터 견지해 온 일관된 자세다.

 금융정책과 홍두선 사무관은 “현재의 금융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며 “지금으로서는 제2금융권의 은행산업 문호 개방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못 박았다.

 금융경제연구소 이찬근 소장은 “금융산업은 은행 주도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겸업화는 은행과 비은행 금융사 쌍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만 현재 제2금융 시장의 주도권을 재벌계 금융사들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회사에 대한 문호 확대는 재벌의 금융 지배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그렇다고 재벌계 금융사들을 분리할 경우 재벌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정부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당분간은 금융산업 재편은 은행 주도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정부 편애 불구 세계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

 이처럼 국내 시장에서는 정부의 ‘편애’를 등에 업고 기세가 등등한 대형 은행들도 이 부총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국제 시장에 내놓으면 ‘동네 골목대장’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 2001년 국민-주택은행 합병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는 세계 시장과 겨룰 대형 은행 탄생이 국내 금융회사의 경쟁력을 한 차원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은행의 주력은 여전히 주택 담보 대출, 신용카드 등 가계 금융시장에 국한돼 있을 뿐, 지난 2003년 지분 참여 형태로 인도네시아의 BII은행을 인수한 것을 제외하면 국제 시장 진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세계 100대 은행 안에 이름을 걸어 놓고 있는 곳은 2003년 말 기준 79위의 KB국민은행뿐이지만 이마저도 2002년도 60위에서 19계단이나 하락한 순위다.

 매년 세계 1000대 은행 순위를 발표하고 있는 <뱅커>지는 올해 7월호에서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국민은행 순위를 79위에 랭크시킨 데 이어, 우리은행도 2002년 114위에서 120위로, 농협은 119위에서 121위로 하향 조정했으며, 기업은행과 하나은행도 각각 156위에서 161위로, 161위에서 169위로 끌어내렸다.

 규모뿐만 아니라 수익성과 건전성 지표상으로 TOP 레벨 은행과의 격차는 크다.

 지난해 말 현재 국내 10대 은행의 BIS 자기자본 비율은 10.77%로 2002년 말(10.72%)과  비교하면 소폭 개선됐지만 영국(12.46%), 미국(12.10%), 일본(12.05%) 등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수준이다.

은행의 수익성을 재단하는 지표인 총자산이익률(ROA) 격차는 더욱 심해 지난해 말 현재 10대 은행의 ROA가 0.20%를 기록, 미국의 1.90%, 영국의 1.06%와는 큰 격차를 보였다.

 또 다른 잣대로 평가해 봐도 여전히 국내 은행이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최근 발표한 ‘경쟁력 지수’를 보면 국내 은행권의 경쟁력은 20.0으로 필리핀(19.2), 요르단(19.2), 타이(16.7)와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수위를 차지한 덴마크(85.0), 네덜란드(84.2), 영국(83.3), 미국(75.0), 프랑스(71.2) 등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금융 부문의 구조 조정이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일본이 경쟁력 지수 12.0을 기록하며 우리나라 뒤에 서 있다는 점 정도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은 인수 합병을 통해 덩치를 불린 대형 은행들이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진출이 용이한 제2금융시장을 제물로 체력을 키우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본업’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시중 은행들의 선진 금융기법이라는 것이 외국계 은행을 흉내 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국내 은행들이 규모 확대에 사활을 거는 모습을 보곤 하지만 세계 최대 씨티은행의 경쟁력은 자산 규모가 아닌 정보력과 노하우에서 나온다”고 꼬집었다.

김정민 서울금융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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