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일본 도쿄에 문을 연 프리미엄 와규(和牛·일본산 소고기) 레스토랑 ‘와규마피아’의 공동 창업자 호리에 다카후미 전 라이브도어 최고경영자(CEO)가 스테이크를 굽고 있다. / 블룸버그

“2019년쯤에 (물가상승률 목표인) 2%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4월 27일 금융정책 결정회의를 열고 이렇게 말했다.

2012년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경제부양 정책)가 시작됐을 때의 목표는 ‘향후 10년간 평균 명목 경제성장률 3%, 물가상승률 2% 달성’이었다. 이후 ‘물가상승률 2%’는 아베노믹스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지표로 여겨져 왔다. 2013년 1월 일본은행은 이 목표를 도입하고 그해 4월 양적·질적 금융완화정책을 도입했다. 디플레이션 늪에 빠진 일본 경제를 구하기 위해 시장에 돈을 풀고, 물가를 끌어올리겠다는 논리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이번 금융정책 결정회의에선 종전에 2019년으로 설정한 물가 목표 달성 시기를 삭제했다. 시장에서는 대규모 금융완화를 지속하는 데도 2% 물가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구로다 총재는 여전히 낙관적이다. 그는 “달성 시기가 정책 스탠스와 기계적으로 연계됐다는 시장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고 했다. 2019년까지 물가상승률이 2%로 오르지 않을 경우 추가 금융완화가 필요하다는 시장의 일부 관측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최근의 일본 물가상승률이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나름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전년 동월 대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17년 4월 -0.1%였다가 12월엔 1.0%로 올랐고, 올해 3월까지 1.0% 이상을 기록했다. 다만 4월엔 0.5%로 떨어졌다.

일본이 물가가 거의 오르지 않던 시기를 오래 겪어 왔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 일본 정부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는지 판단하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근원물가지수(가격 변동이 심한 신선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10월부터 쭉 상승세를 이어 가고 있다.

물가는 의외의 요인으로 오르고 있다. 일본에 불고 있는 ‘고기 붐’이다. 일본 내각부는 지난달 2일 발표한 자료에서 “식료품 가운데 많은 품목의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육식 붐이 한층 뜨거워져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등 신선육의 소비량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올해 2월 근원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0.5% 상승했는데, 그중 식료품 가격 상승분이 0.28%포인트를 차지했다.

산케이신문은 이 자료를 분석해 “물가 상승에 공헌한 것은 식료품으로, 그중에서도 신선육이 지수 상승분의 약 10분의 1을 차지했다”며 “요리 이벤트, ‘고기 축제’ 등이 이어지고 고기의 인기가 높아져 수요가 확대되자 고기 가격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류보다는 생선을 더 많이 섭취해 왔다. 현재 우리가 먹는 형태의 ‘스시’는 개항 전인 에도시대에 넘쳐나는 인구에게 빠르게 공급할 수 있는 대중적인 ‘패스트푸드’로 탄생했다. 반면 육류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육식 금지령이 풀린 메이지유신 이후다. 처음엔 고기를 어떻게 요리해 먹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일본식 소고기 전골인 ‘스키야키’가 이때 탄생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고기 요리 ‘야키니쿠(焼肉·구운 고기라는 뜻)’는 한국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최근 추세가 바뀌었다. 일본인들이 2010년 이후부터 생선보다 육류를 더 많이 섭취하고 있다. ‘고기 붐’ 때문이다. 1인당 연간 육류(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소비량이 2012년 28.4㎏에서 2016년 31.6㎏으로 11% 늘었다.

건강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커지면서 특히 ‘붉은 살코기(赤身肉)’ 인기가 급증했다. 마블링이라고 부르는 지방이 거의 없고, 단백질이 많아 붉게 보이는 부위를 일컫는다.

과거엔 일본인들도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마블링이 많아 연한 고기를 좋아했고, 붉은 살코기는 질겨서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많은 이 부위가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인기가 높아졌고, 숙성(에이징) 기술도 발달해 맛도 향상됐다.

붉은 살코기도 숙성을 거치면 부드럽고 맛이 좋아진다. 한국 농촌진흥청은 마블링이 적은 낮은 등급의 한우 고기를 3주 이상 숙성하면 부드럽고 맛이 좋아진다고 밝혔다. 냉장온도(섭씨 0~4도)에서 일정 기간 보관하는 숙성을 거치면 고기 내에서 자연 발생한 효소가 근육 섬유질을 서서히 분해시켜 육질을 부드럽게 하고 연도와 맛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와규마피아’에서 셰프가 와규스시를 들고 있다. / 블룸버그

육류 소비량 4년간 11% 증가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는 탄수화물이 많은 옥수수·콩 등을 사료로 먹이면 많이 얻을 수 있다. 반면 마블링이 적고 붉은 살코기가 많은 소고기를 얻으려면 풀을 먹여 키워야 한다. 그래서 소에게 사료를 먹이던 축산 농가가 초지에 소를 방목해 풀을 먹이는 방식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소고기 수요가 늘자 송아지 가격도 2008년 한 마리당 35만엔 수준에서 지난해엔 77만엔 수준으로 10년 만에 두 배가 됐다.

TV아사히는 “‘붉은 살코기’와 ‘숙성육’이 지금 유례없는 ‘고기 붐’을 일으켜 높은 인기 속에 육류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고 했다. 유명 스테이크 레스토랑 ‘BLT 스테이크 롯폰기’의 T본 스테이크는 최고급 소고기를 드라이 에이징(건식 숙성)시켜 감칠맛과 향기를 높인 뒤 섭씨 925도에서 구워 낸다. T본 스테이크 750g의 가격은 1만5000엔(약 15만원)이다. 이 점포의 셰프는 “자녀와 함께 오는 가족, 고령층까지 폭 넓은 연령대의 고객이 찾고 있다”며 “점심부터 저녁까지 작년과 비교해 고객이 늘었다는 점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보면 구로다 총재가 웃음을 지을 만하다. 생각지 않았던 고기 붐에 물가가 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악재가 발생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다.

일본 총무성이 4월 27일 발표한 도쿄 지역 근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0.6% 상승했다. 3월의 0.8%보다 상승폭이 감소했다. 총무성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 마찰의 여파로 일본 시장에서 돼지고기 가격이 하락한 영향이 컸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중국산 철강·알루미늄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은 보복 조치로 돼지고기에 25%, 과일·와인 등에 15%의 관세를 부과했다. 그러자 중국으로 가지 못한 미국산 돼지고기가 일본에 대량 유입돼 가격이 떨어졌다. 고기 붐으로 육류 가격이 올라 물가가 상승하던 추세에 미·중 무역 마찰이 악재로 작용한 것이다.

손덕호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