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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8월 27일(현지시각) 한 신흥국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로이터통신과 인터뷰를 갖고 “우리는 정부로부터는 독립돼 있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는 독립돼 있지 않다(We are now independent from government, but we are not independent from the Fed)”고 말해 논란이 됐다. be 동사를 이용한 평이한 1형식 문장. 왜 이 단순한 문장이 논란이 됐을까.

전후 맥락을 곱씹어 보면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발언한 장소와 대화한 상대방을 생각하면 신흥국 국민 모두에게 서글픔과 비애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발언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나는 나약한 아버지로부터는 독립돼 있지만, 힘센 옆집 아저씨로부터는 독립돼 있지 않다’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독립된 중앙은행까지 종속시킬 수 있는 미 연준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연준은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의 약자로서 연방(Federal)은 연방행정관청이라는 의미이고, 준비(Reserve)는 금본위제의 지급준비금, 즉 뱅크런 방지를 위해 은행 금고에 쌓아 두던 금덩어리를 의미하며, 제도(System)는 단일 기구가 아니라 복합적 기구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미국에는 영란은행(BOE· Bank of England), 일본은행(BOJ) 같은 중앙은행(central bank)이 없다.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민관복합체가 존재할 뿐이다. ‘미국 연방헌법’에는 연준에 대한 명시적 근거 조항이 없다. 다만, 미국의 헌법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연방의회의 화폐에 대한 규제권한(헌법 제1조)과 연방대통령의 일반적 행정권한(헌법 제2조)을 연준 설립의 간접적 근거 조항으로 보고 있다. 결국 미 연준은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에 근거한 법률기관, 즉 의회와 대통령이 합심해 만든 기관이다.

미 연준은 지방(주·州) 이익을 대표하는 12개 준비은행(Reserve Banks), 중앙(聯邦)의 이익을 대변하는 연준이사회(Board of Governors), 지방과 중앙이 함께 참여하는 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라는 세 개 기관으로 구성된 하나의 제도다. 연준의 설계자들은 의도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반영된 ‘복합적인 시스템으로서의 화폐통제기구’를 만들었다. 1913년 ‘연준법’ 제정 당시에는 12개 준비은행이 제각기 독립된 중앙은행의 역할을 했으나, 1929년 대공황 발생으로 분권적 제도의 약점이 드러나자 1935년 ‘연준법’을 개정해 연방 중심의 연준이사회와 공개시장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벤또·다라이·연준이사회, 알고 보면 형제

참고로 ‘연준이사회’라는 명칭은 식민지 시대 일본 학계의 잘못된 번역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세운 조선은행의 후예인 한국은행이 그대로 답습하면서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즉, ‘벤또(도시락)’ ‘다라이(대야)’ ‘나와바리(권한영역)’ 같은 것이다. 원래 ‘governor’는 상법상 이사가 아니라 영미법상의 특수한 행정관의 명칭이다. governor는 영국법상 개념으로서, 국왕이 자신의 통치권을 위임한 사람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governor는 식민지 지역에서 국왕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는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대표를 의미하기도 하고, 국왕의 특허를 받아 화폐발행권을 행사하는 영란은행 대표를 의미하기도 했다. 따라서 연준이사회는 연방준비위원회(행정위원회)로 번역해야 하고,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은행장(법인대표)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연방준비법’상 미 재무부와 연준의 관계는 상하 관계에 있다. 재무 장관이 연준에 대한 유보권(reserve power)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준이사회의 권한이 재무 장관의 권한에 저촉되는 경우 그 권한은 재무 장관의 감독·통제하에 행사돼야 한다. 하지만 관례적으로 재무 장관이 직접 연준에게 감독·통제권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재무부와 연준 간에 정례적인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 체결을 통해 연준의 권한 범위를 사전에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꿀밤을 매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훈계하지 않는 것이다.

미 의회(법률제정권자)와 대통령(법률거부권자)은 ‘연방준비법’을 통해 연준에게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 임무(dual mandate)를 부여하고 있다. 미 연준은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을 모두 염두에 두면서 통화정책을 수행해야 하지만, 경기과열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물가안정에 무게를 둘 수 있고, 경기침체로 장기불황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완전고용에 가중치를 둘 수 있다. 미 의회와 대통령은 연준을 창설하면서 넓은 시계와 전술적 탄력성을 부여한 것이다.


파월, 매가 되고 싶은 비둘기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로 미국의 경기불황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2020년 6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금리 인하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해임 가능성을 거론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자 임명권자로서의 권한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두 달 뒤 2020년 8월 말 미 연준은 통화정책 운용 방식을 바꿨다. 인플레이션이 연준 목표치인 2%를 초과하더라도 당장 금리를 인상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제로금리를 계속 유지하는 평균물가목표방식(AIT)을 채택한 것이다. 

대통령의 분노에 화들짝 놀란 파월 의장은 금리 인하를 서두르면서도 장차 시행될 초완화적 통화정책의 근거가 필요했다. 당시 미 연준은 평균물가목표방식을 따를 경우 제로금리 유지 기간이 2024년 말까지 연장되고 실업률도 유의미하게 더 낮아진다는 실증분석 결과까지 제시했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파월 의장은 기자회견장에서 평균물가목표방식을 선언하면서 그 근거가 된 10여 개의 연준보고서를 자랑스럽게 공개했다고 한다. 지금은 인플레이션 터미네이터로 변신해 기자회견장마다 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파월 의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는 ‘2024년까지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던 유순한 비둘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 연준은 전 세계 중앙은행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에서 국민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권력이 존재할 수 없듯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정관청은 존재할 수 없다. 제주 대정향교에 가면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어린 학동들에게 ‘항상 의문을 품고 살라’는 의미에서 직접 현판을 써줬다고 한다. 지금도 유효한 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현자를 기리는 마음에서 우리도 한번 이 시점에서 의문을 가져보도록 하자. 신흥국 중앙은행장은 국민과 대통령을 무서워하지 않는 데 반해 미 연준 의장은 국민과 대통령을 두려워한다면, 신흥국 중앙은행장과 미 연준 의장 중 누가 더 강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 모두가 왕의 신하(All the King’s men)에 불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