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 세종대왕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때문에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이 세종을 후계자로 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술을 잘(?) 마실 줄 알아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거 무슨 되도 않는 말이냐고 하겠지만 태종실록에 이와 관련한 사연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태종실록 18년(1418년) 6월 3일자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으로서 왕세자를 삼다’에서 태종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이 된다’고 하였다”면서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을 비교하고 있다.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심히 곧아서 자세하게 일을 조목조목 처리하는 것이 없다고 평한다. 반면 충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해 병이 날까 두려울 정도일 뿐 아니라 다스리는 법을 알아서 매양 큰일에 의견을 내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두 대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한 태종의 평가여서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없다. 다만 태종의 마음이 이미 충녕으로 굳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록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충녕은 중국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중국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성품과 자질에서 뛰어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술을 잘 마실 줄 아느냐, 즉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효령대군과는 달리 술을 제법 마실 줄도 알고 또 적당한 선에서 그만 마실 줄 아는 충녕대군을 세자로 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는 뜻의 사자성어가 바로 ‘적중이지(適中而止)’다.
수년 전 선거에서 한 정치인이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은 적이 있다. 누가 그 같은 여유 있는 삶을 싫어하랴?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2014년)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124시간으로 OECD 34개 회원국 중 멕시코(2228시간) 다음으로 긴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근로자들은 OECD 회원국 평균 1770시간에 비해서는 350시간 이상,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1371시간)에 비해서는 무려 753시간 더 많이 일하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일을 하려면 저녁이 있는 삶은커녕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이런 삶이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는 여러 기관에서 발표하는 행복지수에서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하는 ‘삶의 질(Quality of Life)’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조사대상국 59개국 중 34위에 머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젊어서는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는 즐겨본 경험이 없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고 있다. 소득 3만달러 시대의 국민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이제 놀 줄도, 놀 시간을 만들어낼 줄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 여행만 해도 다녀본 사람이 잘 다니기 마련이다. 또한 “여행은 가슴 떨릴 때 하는 일이지 다리 떨릴 때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참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젊어서부터 직장 일은 제쳐두고 여행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 오래 일만 하는 것도, 일은 소홀히 하면서 여행을 다니거나 취미생활에 미치는 것도 둘 다 바람직하지는 않다. 이 때 나오는 것이 바로 적중이지. 일하면서도 즐기면서도 적정한 선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노후 준비와 연결하면 일만 한다고 해서 또는 여행만 다닌다고 해서 노후 준비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여행과 마찬가지로 노후 준비 역시 가슴 떨릴 때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후의 행복을 위해서는 일도 여행도 적정한 선에서 줄이거나 늘리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언제나 구두끈 늦게 매는 친구가 있다. 밥값은커녕 커피 값도 한 번 내지 않는다. 말이나 말 것이지 내 손에 돈이 있어야 노후가 편안해진다면서 노후와 미래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럼 밥값을 내는 친구들은 자신의 노후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멍청한 놈들인가? 가족이나 친구나 한 번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다. 무엇이나 평소에 적정한 선에서 밀고 당기는 밀당의 노력, 적중이지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친구 중에서도 배우자를 포함한 가족은 가장 중요한 친구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 집에 가서 이런 연습 한 번 해보자. 온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술 한 잔 앞에 놓고 배우자를 향해 외쳐 보자. “소취하 당취평!(소주에 취하니 하루가 즐겁고, 당신에 취하니 평생이 즐겁다)”이라고. 소주가 아니라 막걸리라면 막취하가 될 것이고 맥주라면 맥취하가 될 뿐 무슨 술인지는 중요치 않다.
적중이지, 술이든 일이든 여행이든 적당한 선에서 그치면 하루가 즐거울 뿐 아니라 왕(王)도 될 수 있다. 즐거운 하루를 한 달, 일 년, 평생으로 만드는 노력은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달려있다. 즐거워야 인생이다.
▒ 최성환
고려대 경제학과, 한국은행 조사부(워싱턴),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대한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현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 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