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앨리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주변 세계가 이미 앞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고, 최소한 주변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하더라도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도 붉은 여왕이 지배하는 앨리스입니다.”

서울공대 26명의 석학들이 한국 산업의 위기를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축적의 시간>을 총괄기획한 이정동 서울공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현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이 교수는 책을 기획한 계기에 대해 “기존의 미래진단들은 대부분 거시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처방들이다. 우리는 보다 산업현장 가까이에서 미시적으로 접근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우리 기업과 정부, 학교 모두 현재 잘하고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 누군가는 현실을 직시하는 아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뜻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제가 교수진들에게 이런 취지로 메일을 한 통씩 보냈는데 놀랍게도 모두들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털어놓을 만한 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일이 만나러 갔더니 모두들 자료를 뽑아서 하실 이야기들을 다 준비해 놓고 계시더라고요.”
책은 이정동 교수와 서울공대 강신형 교수(기계항공공학부-유체기계), 강태진 교수(재료공학부-섬유·소재), 고현무 교수(건설환경공학부-토목구조), 권동일 교수(재료공학부-소재기초), 김승조 교수(기계항공공학부-항공우주), 김용환 교수(조선해양공학과-해양플랜트), 박희재 교수(전기정보공학부-반도체 장비), 현택환 교수(화학생물공학부-나노소재) 등 교수진들의 대담을 글로 풀어냈다. 이정동 교수는 “각 교수들의 전문 분야는 모두 다르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그 방향이 같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한 앞으로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은 구조적인 저성장 기조를 이어가는 이른바 ‘뉴노멀’ 시대로 접어들게 될 거라는 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지난 50년간 유일한 최고 수준의 성공 사례로 꼽히며, 더구나 한국은 부존자원이 아닌 혁신적 노력으로 이룩한 경제성장이기에 더 놀랍습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최근 여러 가지 위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고, 더 큰 우려는 이러한 위기가 최근 한두 해에 걸쳐 일어난 것이 아닌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지속하고 있는 추세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우리 산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개념 설계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간 후발 추격 국가로서 선진국에서 이미 검증을 마친 개념설계를 빠르게 확보해 우리 것으로 만들고, 생산에 적용하는 데 특화돼 왔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와 같은 산업발전 모델에서는 개념설계 역량을 확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일단 선진기업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임시 대응하고, 일시적인 자원 동원으로 해결 가능한 규모집약적인 영역을 우선시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산업의 기반을 속성으로 마련하는 덴 탁월했다”면서 “그러나 개념설계를 위한 경험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 핵심부품소재는 물론이고, 새로운 제품 정의도 계속 산업선진국의 기업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우리의 주변 환경도 위협적이다. 특히 중국은 ‘시간’적으로는 근대 산업기술의 경험이 길지 않지만, ‘공간’적으로 내수시장이 크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매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유하자면, 산업선진국들이 100년에 걸쳐 경험하게 될 개념설계의 사례들을 10년 만에 10배 많은 수의 사례를 축적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것. 이 교수는 “우리나라가 지금껏 선진국의 개념설계를 받아 와 생산했듯이, 앞으로는 중국의 개념설계를 받아 와 생산해서 중국에 납품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저자들은 “한국산업을 지배하는 몇 가지 잘못된 고정관념도 이제는 바꿔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우선적으로 바꿔야 할 고정관념은, ‘생산 활동은 개도국으로 아웃소싱하고 우리나라는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이 교수는 “생산현장이 없이는 질 좋은 고용을 창출할 방법이 없고, 생산을 지원하는 지식기반서비스업의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생산현장이 없으면 고부가가치 창출의 원천이 되는 고급의 경험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여지도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고정관념은 ‘첨단 특허 한건, 세계적 논문 한편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우려를 드러냈다. “탁월한 특허와 논문이 분명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혁신적 아이디어가 스케일업(scale-up)되어 실용화 단계로 나가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국내 산업계는 전례가 없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스케일업 할 수 있는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설사 국내에서 세계적 논문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 혜택은 다른 나라가 볼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시행착오를 각오하면서 경험을 축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