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현지시각) 터키군이 쿠르드족 거주지역인 시리아 북부지역을 공습했다. 이 공습으로 상처 입은 한 소녀가 아버지의 팔에 안겨 이동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10월 22일(현지시각) 터키군이 쿠르드족 거주지역인 시리아 북부지역을 공습했다. 이 공습으로 상처 입은 한 소녀가 아버지의 팔에 안겨 이동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세계 최대 유랑 민족 쿠르드족과 터키의 전쟁이 장기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쿠르드족은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지만 터키(1540만 명), 이란(680만 명), 이라크(430만 명), 시리아(130만 명)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한 번도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특히 전체 인구의 24%가 쿠르드족이며 시리아 북부에 사는 쿠르드족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는 독립국 건국에 반대하며 쿠르드족과의 전쟁을 계속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0월 23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터키와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사이 ‘영구적(permanent)’ 휴전이 있을 것”이라며 “터키에 부과한 모든 제재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터키와 쿠르드족이 휴전에 합의한 것은 미군 철수가 시발점이 됐다. 미국은 10월 6일부터 시리아 북부지역에 있던 1000명의 병력을 이라크 북부로 이동시켰다. 터키는 이를 미국이 쿠르드족을 공격할 길을 터준 것으로 해석해 7일부터 이 지역에 지상군을 투입해 쿠르드족을 공격했다. 하지만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고 여론이 악화하자 미국은 14일 터키에 대해 미국 내 자산동결 등 경제제재를 했다. 터키와 쿠르드족이 장기적 휴전에 합의하면서 앞으로 쿠르드족이 독립국을 만들 수 있을지 여부도 국제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쿠르드족은 지난 100여년간 여러 차례 독립을 위해 싸워왔지만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의 배신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쿠르드족은 독립국을 만들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주변국의 배신으로 좌절됐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으로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이 무너질 때 터키 내 쿠르드족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이후 터키공화국이 세워지면서 터키는 서구에 “쿠르드를 독립시켜주면 안 된다”고 설득해 이들을 터키공화국에 편입되도록 했다.

1946년에는 이란에 살던 쿠르드족이 구소련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Republic of Mahabad)을 세웠다. 하지만 이 역시 서방의 지원을 받은 이란군의 공격으로 궤멸당했다. 당시 구소련은 마하바드 공화국의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1972년에는 친미 팔레비 왕조가 이끄는 이란이 접경국 이라크와 국경선을 놓고 싸울 때 쿠르드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도 동맹인 팔레비 왕조를 돕기 위해 쿠르드족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며 이라크와 대신 싸워달라고 했다. 미국과 팔레비 왕조는 이라크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3년 뒤인 1975년 이란과 이라크 관계가 개선되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80~88년 이라크는 이란과 다시 전쟁을 벌이면서 쿠르드족을 자기편에 서도록 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은 1988년 전쟁이 끝날 무렵 쿠르드가 독립하거나 이란 편으로 돌아설 것을 우려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대량학살하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 레이건 정부는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알고도 눈감았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쿠르드족의 죽음을 이용한 것이다.


연결 포인트 1
석유가 발목 잡은 독립
키르쿠크 등 주요지 열강 각축장

쿠르드족이 독립국을 세우지 못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석유다.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곳이 많기 때문에 이 지역을 쿠르드족에게 내줄 수 없다는 게 주변국들의 입장이다.

대표적인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영국의 태도다. 연합국과 패전국인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은 당시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고 터키 내 쿠르드족의 독립 자치권을 약속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내 쿠르드 밀집지역인 키르쿠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연합국의 입장은 돌변했다. 영국이 중심이 된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을 파기했다.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한 키르쿠크는 영국령 이라크로 편입됐다.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풍부한 유전지대라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했고 이게 독립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연결 포인트 2
터키와의 악연
4만 명 목숨 앗아간 전쟁도 발생

쿠르드족은 터키와 가장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터키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전체 인구의 24%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독립할 경우 터키의 국력은 크게 약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터키는 쿠르드족을 강력하게 탄압해왔다.

1920년대에는 아예 언어와 전통 의상 착용 등을 금지하기도 했다. 쿠르드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금지했다. 이런 정책에 반발해 쿠르드족 일부는 1978년 무장 단체인 쿠르드 노동자당(PKK)을 설립해 터키 정부를 상대로 폭탄테러와 폭력시위를 계속했다.

PKK는 1984년 8월 15일 쿠르드 봉기를 선언했고 이 봉기는 1999년 9월 1일 PKK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 봉기로 4만여 명이 숨졌으며,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연결 포인트 3
독립투쟁의 핵심‘쿠르드 노동자당’
국민영웅 압둘라 오잘란 설립

쿠르드족과 터키의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압둘라 오잘란이다. 그는 터키 남동부 쿠르드족 밀집 지역인 샤늘르우르파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기록에 따라 1946년에서 1948년으로 조금씩 다르다. 1978년 쿠르드족 대학생들을 이끌고 PKK를 설립했다. PKK는 쿠르드족이 사는 지역(쿠르디스탄)에 독립 공산국가 수립을 목표로 삼는 조직이다. 지금도 쿠르드족이 그의 사진이 인쇄된 깃발을 들고 시위와 테러를 할 정도로 국민적 영웅이다.

그는 1999년 터키국가정보국(MIT)에 체포돼 터키로 압송됐다. 이후 터키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EU가 터키의 회원국 가입조건으로 사형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현재는 터키 내해인 마르마라해에 있는 이마랄리섬의 감옥에 홀로 수감돼 있다.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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