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현지시각) 이란 정부의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촉발된 반(反)정부 시위 중에 불탄 이란 테헤란의 한 주유소. 사진 AP연합
11월 20일(현지시각) 이란 정부의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촉발된 반(反)정부 시위 중에 불탄 이란 테헤란의 한 주유소. 사진 AP연합

매장량 기준 세계 4위 산유국 이란이 휘발유 가격 ‘50원 인상’으로 깊은 내홍을 겪고 있다. 이란 정부는 11월 14일(이하 현지시각)에서 15일로 넘어가는 밤 12시에 기습적으로 휘발유 가격 인상안을 발표했다. 휘발유 가격을 1ℓ(리터)당 1만리알(약 100원)에서 1만5000리알(약 150원)로 올렸다. 개인이 구매할 수 있는 휘발유량은 월 60ℓ로 제한했다. 이를 초과해 휘발유를 사면 1ℓ당 3만리알(약 300원)을 내야 한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15일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늘어날 재정 수입은 정부에 귀속하지 않고 오로지 저소득층과 제재로 피해를 본 분야에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란 국민은 휘발유 가격 인상 발표 이후 반(反)정부 시위에 나섰다. 이란 국민은 미국의 핵협정 탈퇴와 경제 제재 부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화폐개혁으로 저축액이 증발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휘발유 가격까지 오르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15~16일 수도 테헤란과 이스파한 등 이란 주요 도시 1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차량을 세워 고속도로를 점거하거나 공공기물을 훼손하고 주유소에 불을 질렀다. 이란 정보부는 15~16일, 이란 전역에서 시위대의 방화로 은행 100곳과 상점 57곳이 소실됐다고 밝혔다. 이란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8만7000여 명 중 1000여 명을 폭력 행사나 시위 선동 혐의로 체포했다.

이란 시위는 해소 국면에 접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시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17일 이번 시위를 폭동이라고 비판한 데 이어 다음 날인 18일 이란 정예군 혁명수비대(IRGC)가 “시위에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 정부는 18일 경제력이 떨어지는 1800만 가구(약 6000만 명)에 생계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유화책도 내놨다.

시위를 테러,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움직임도 있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19일 밤 기업인 대표단을 만나 “우리가 군사, 정치, 안보, 경제 전쟁에서 적의 공작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우방과 적 모두 알아야 한다”라며 “최근 일어난 소요는 안보 문제로, 평범한 국민이 일으킨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가 언급한 ‘적’이란 미국, 영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란과 적대적 관계인 나라를 말한다. 알리 라비에이 이란 정부 대변인도 19일 “거리에서 폭도들이 폭력을 행사해 국민의 목소리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시위 기간에 사망자도 속출한 것으로 보인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19일 “믿을 수 있는 보고에 따르면 이란 내 21개 도시에서 최소 106명의 시위 참가자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또 “실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을 수 있다”며 “200명 이상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앰네스티가 입수한 영상에는 이란 보안군이 헬기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쏜 것으로 보이는 장면도 1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안군이 총기, 최루가스, 물대포를 사용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해산하는 장면도 포함됐다고 한다.


연결 포인트 1
이란 소요의 원흉 ‘미국’

이번 시위는 미국의 제재로 인한 이란의 경제 위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이란 핵협정(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탈퇴하면서 내린 경제 제재로 이란은 석유 수출길 대부분이 막혀 재정이 바닥났다. 올해 이란의 인플레이션율은 이미 40%를 넘었고,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란 경제가 올해 마이너스 9.5% 역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은 휘발유 가격 인상이 생필품 가격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란 정부의 휘발유 가격 인상에 대해 중동 전문 매체 미들이스트모니터는 “미국은 이를 이란의 후퇴 신호로 보고 반길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이란 시위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악관은 17일 성명에서 “미국은 이란 국민의 평화적인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다”며 “시위대에 가해진 치명적인 무력과 심각한 통신 제한을 규탄한다”고 했다.


연결 포인트 2
휘발유 수입하는 산유국

이란은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지만, 대량으로 휘발유를 수입해서 쓰는 나라다. 원유 정제 시설이 미비한 탓이다. 미국 등 서구권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면서 외국 대형 정유 업체들이 과거 이란에 설치한 원유 정제 시설을 개·보수하지 않아 노후화한 상태다. 새 정제 시설 건설도 이뤄지지 않아 이란의 정제 시설 수는 다른 중동 국가보다 적은 편이다.

이란 정부는 수입품인 휘발유 가격 안정을 위해 매년 23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투입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 부활 탓에 원유 수출길이 막혀 재정 압박이 강해지자 보조금을 삭감한 것이 이번 휘발유 가격 인상의 배경이다. 이란의 원유 수출량은 하루 250만 배럴에서 미국의 제재 부활 이후 5분의 1 수준인 50만 배럴로 크게 떨어졌다. 중국이 그나마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지만, 미국이 중국 기업마저 제재 명단에 올린 상황이다.


연결 포인트 3
‘시아파 벨트’ 위기

이란 지도부가 이번 시위에 강경 대응한 데 대해 중동 내 시아파의 지배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반영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동 내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이 초승달 형태로 연결된 것을 가리켜 ‘초승달 벨트’ 혹은 ‘시아파 벨트’라고 한다. 전 세계 이슬람교도 중 수니파가 90%를 차지하며 시아파는 10%로 소수다. 시아파 벨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온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 꼽히며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 진영과 맞서왔다.

하지만 이란이 미국의 제재 탓에 더는 동맹국들을 지원할 수 없게 되면서 시아파 벨트 전체가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더타임스는 “시아파 3개국의 경제 위기 의식은 미국의 이란 적대 정책 때문에 더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시아파 진영에서 이란뿐만 아니라 이라크, 레바논도 민생고에 대한 반발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면서 사회 혼란을 겪고 있다.

임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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