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9월 1일 오전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9월 1일 오전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건강을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후임 자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출 방식이 결국 약식 선거로 결정됐다. 이로써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의 지지를 기반으로 ‘포스트 아베’ 자리에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당원까지 참여하는 정식 선거가 이뤄진다면 대중의 지지도가 높은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유리하지만, 약식 선거에선 당내 의원 지지 세력을 많이 확보한 스가 장관이 사실상 독주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선 집권당 총재가 국회의 총리로 선출된다.

일본 방송 NHK에 따르면 자민당 총무위원회는 9월 1일 본부 회의에서 당원 투표를 생략하고 양원 의원총회를 통해 새 총리를 뽑기로 했다. 이에 따라 9월 14일로 예정된 투표에서 자민당 국회의원 394명과 각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지부 연합회 대표 141명 중 과반(268표)의 표를 얻는 사람이 총재가 된다. 통상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과 당원이 각각 394표를 행사해왔으나 긴급한 경우 예외적으로 약식 선거를 시행할 수 있다. 이 경우 국회의원 표가 당락을 좌우하며, 주류 파벌이 선호하는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스가 장관은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아베 총리가 소속된 1위 호소다파(98명), 2위 아소파(54명), 4위 니카이파(47명)의 지지를 얻어 이미 자민당 내 60%에 육박하는 지지를 확보했다.

스가 장관은 세습·엘리트 정치가 횡행한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 정계 핵심부에서 드물게 자수성가한 ‘흙수저’ 정치인이다. 그는 부모 배경, 파벌, 명문대 학벌, 지역구 세습 없이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시작해 1996년 자민당 공천으로 국회에 진출한 8선 의원이다. 아키타현의 딸기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의원 세습 제한’을 정치적 의제로 삼은 적도 있는 만큼, 일본에서 무파벌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파벌이 없는 스가 장관이 자민당 주요 파벌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아베 총리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는 평가다. 스가는 8년 가까이 아베 정권에서 정부 대변인 역할을 했고 2002년부터 북한의 만경봉호 입항 금지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아베의 최측근이 됐다. 따라서 아베 정책을 그가 일관성 있게 이어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민당 내에서 크다. 다만 아베보다는 한국 관계를 포함한 여러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유연한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로 분류된다.

새 일본 총리의 임기는 자민당 총재 잔여 임기인 2021년 9월까지 딱 1년이다. 자민당은 이 과도기에 전향적인 정책을 시행할 가능성이 큰, 여론 조사 1위의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당원 선거를 생략하고 당내에서 ‘아베의 입’인 스가를 지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8월 29일 교도통신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시바 전 간사장은 34.3%의 지지율을 확보했으며, 스가 장관의 지지율은 14.3%에 머물렀다.


기자회견 후 아베 신조(왼쪽) 일본 총리가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기자회견 후 아베 신조(왼쪽) 일본 총리가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1
스가, 유연한 ‘포스트 아베’

일본의 차기 유력 총리 후보로 부상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한·일 관계에서 아베 정책을 계승하되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균형적인 입장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스가 장관은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이지만 아베 총리가 2013년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때 ‘경제 재생이 우선’이라며 반대하는 등 합리적인 의견도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상대적으로 ‘친한파’로 분류됨에도 오랜 기간 아베 총리의 ‘은덕’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베에게 끌려다닐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전문가 분석도 있다. 또한 2013년과 2014년에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라고 말하는 등 한국에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비관적인 입장도 있다.

스가는 경제 측면에서도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를 일부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는 스가가 금융 시장 정책 연속성을 위해 대규모 재정 지출, 금융 완화 등을 골자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고 9월 1일 보도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해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를 공개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해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를 공개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2
한·일 통상 관계 개선되나

전문가들은 한·일 통상 관계가 아베 재임 기간보다 개선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들은 경직된 한·일 관계를 풀고 우리 수출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중국, 아랍에미리트(UAE) 등과 맺은 ‘기업인 특별입국(패스트트랙)’을 일본과도 추진할 것을 권했다.

일본 내에서도 아베의 수출 규제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목소리가 있는 만큼 개선 여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라는 기존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완화된 통상 절차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는 “아베 총리보다는 합리적이라고 평가받는 스가 장관이 차기 총리가 된다면 (일본 통상을 담당하는)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재생담당상도 지금보다는 한국에 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며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일 통상 당국 실무진에서 패스트트랙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언론과 인터뷰에서 말했다.


2019년 8월 12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2019년 8월 12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연결 포인트 3
‘어차피 아베 계승’ 비관론도

그럼에도 전문가 사이에선 스가 장관 역시 아베 정권의 경직된 대한 경제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아베 계승주의를 앞세우고 있는 만큼 경제 정책 기조를 쉽게 바꿀 수 없어 수출 규제 갈등 해결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 정부 역시 아베 후임이 당선되기 전까지 대일본 경제 제재를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월 31일 일본의 3대 품목 수출 규제에 따른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 등 경제 통상 정책의 기본 틀을 유지하며 신중히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앞서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하자 일본은 이에 반발하며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관한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했고, 소재 부품의 대일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후임 총리로 스가 장관을 포함한 누가 되든 반한 성향이 강한 자민당의 일제 피해 배상에 대한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한·일 경제 관계 역시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는 시각이 있다.

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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