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 최종 라운드에 진출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0월 16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각국 대사들을 초청해 개최한 리셉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 최종 라운드에 진출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0월 16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각국 대사들을 초청해 개최한 리셉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첫 한국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도전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회원국 대상 최종 선호도 조사에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에 뒤처진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에 따르면, 데이비드 워커 WTO 일반이사회 의장은 10월 28일(이하 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원국 대사급 회의에서 “오콘조이웨알라 후보가 더 많이 득표했다”고 밝혔다. 관례상 정확한 득표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복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WTO 회원 164국 가운데 절반이 넘는 96국 안팎이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는 회원국 104개국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수치를 놓고는 애초 예상보다는 격차가 크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미국이 유 본부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면서 WTO 차기 사무총장 선거전 결과를 알 수 없게 됐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10월 28일 성명을 통해 “미국은 WTO의 차기 사무총장으로 한국의 유 본부장이 선출되는 것을 지지한다”면서 유 본부장 공식 지지를 선언했다. USTR은 “유 본부장은 성공적인 통상 협상가와 무역 정책 입안자로서 25년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진정한 통상 전문가”라며 “이 조직의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량을 갖췄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지금 WTO와 국제 통상은 매우 어려운 시기”라며 “25년간 다자간 관세 협상이 없었고 분쟁 해결 체계가 통제 불능이며 기본적인 투명성의 의무를 지키는 회원국이 너무 적다”고 말했다. 또 “WTO는 중대한 개혁이 매우 필요하다”며 “현장에서 직접 해본 경험이 있는 누군가가 이끌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오콘조이웨알라 후보가 선호도 조사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도 미국은 유 본부장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상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오콘조이웨알라 후보 쪽으로 기울던 다른 회원국의 입장 변화 여부를 비롯해 향후 판세 변화가 있을지도 주목된다. 향후 치열한 물밑 외교전이 펼쳐질 것으로 관측된다. 유럽연합(EU)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막판에 유 본부장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이미 판세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 쪽으로 상당히 기울었고,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동맹국과 갈등 자초 등으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유 본부장이 판세를 뒤집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이 거부권으로 WTO에 혼란을 일으켰다”며 “새 총장을 선출하려는 노력이 장애물에 부딪혔다”고 평가했다.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승리할 경우 미국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WTO 사무총장은 모든 회원국의 ‘컨센서스(의견 일치)’를 얻어야 최종 선출된다. WTO는 컨센서스 도출 과정을 거쳐 회원국이 합의한 후보를 11월 9일 열리는 특별일반이사회에서 차기 사무총장으로 추대한다는 방침이다.


EU 회원국의 지지를 받게 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 사진 AFP연합
EU 회원국의 지지를 받게 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 사진 AFP연합

연결 포인트 1
나이지리아 지지하는 EU와 중국

EU와 중국의 입장 변화가 차기 WTO 사무총장 선출에서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EU는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U 회원국 표가 중요한 이유는 EU 회원국 27개국이 한 후보에게 몰표를 주기 때문이다. 중국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 공개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에 공을 들이고 있어 오콘조이웨알라 편을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록웰 WTO 대변인 말을 인용하면서 WTO 회의에서 중국 측은 “‘트로이카(troika)’의 과정을 지지하며 그 과정은 잘 진행돼 왔고 결과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SCMP는 중국의 이런 언급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한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트로이카는 WTO의 일반이사회 의장, 분쟁해결기구 의장, 무역정책검토기구 의장 등 3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애초부터 유 본부장이 WTO 사무총장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일본은 공식 코멘트를 피하는 등 신중한 자세를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 AP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 AP연합

연결 포인트 2
미·중 대리전 양상

WTO 사무총장 선거가 미국과 중국 간 대리전이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고, 특히 WTO 개혁은 물론 최근 전방위에 걸쳐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노선에 따른 고립주의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WTO가 그동안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며 전면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호베르토 아제베도 WTO 사무총장이 사임 의사를 밝히자 “WTO는 끔찍하다”며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대우해 미국이 못 받는 혜택을 많이 받게 했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특히 지난 9월 미·중 무역전쟁에 관한 WTO의 1심 판정이 미·중 갈등에 불을 질렀다는 평가다. WTO가 미국의 대중 관세 부과가 부적절하다고 판정하자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WTO를 활용해 미국 노동자·기업·농민·축산업자를 이용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본부. 사진 블룸버그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본부.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3
컨센서스 무산 가능성도

WTO 사무총장 선거는 미국·중국·EU 등 강대국이 특정 후보를 반대할 경우 컨센서스(의견일치)를 도출하기 어려운 구조다. 한국 정부 역시 그간 외교력을 총동원해 온 만큼 자진 사퇴보다는 ‘끝까지 가보자’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회원국 간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전반기와 후반기 사무총장을 나누는 등의 합의안이 도출될 수도 있다. 1999년 사무총장 선거가 대표 사례다. 당시 마이크 무어 전 뉴질랜드 총리와 수파차이 파니치팍디 전 태국 부총리가 각각 선진국과 후진국의 표를 나눠 가지면서 막판까지 경합했다. 두 후보 측은 끝내 합의하지 못했고, 사무총장 임기를 6년으로 늘려 마이크 무어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수파차이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각각 3년씩 나눠 맡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 WTO 차기 사무총장이 투표로 선출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가디언은 “미국이 계속 나이지리아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WTO는 지난 25년 동안 컨센서스로 사무총장을 선출한 것과 달리 결국 투표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임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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