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 인텔 본사. 사진 블룸버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 인텔 본사. 사진 블룸버그

인텔이 미국 애리조나주에 200억달러(약 22조6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시설(팹)을 증설하고,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 진출한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 SK하이닉스의 맹추격에 쫓기던 ‘반도체 왕국’ 인텔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며, 대만 TSMC와 삼성전자의 양강 구도로 굳어졌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의 출현을 알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블룸버그와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3월 23일 인텔은 애리조나주에 있는 오코틸로에 반도체 팹 2곳을 짓는 데 200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와 전자제품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상황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인지하고 공격적인 행보에 나선 것이다.

인텔은 2016년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했다가 2년 만에 철수했다. 인텔 출신으로 올해 2월 새로운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팻 겔싱어가 주도한 첫 프로젝트라는 점도 관심을 끈다.

이날 글로벌 미디어 브리핑에서 가장 관심을 끈 내용은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이다. 겔싱어 CEO는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이 2025년까지 잠재적으로 1000억달러(113조원) 규모의 시장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며, 모바일 장치에 사용되는 ARM 기술 기반 칩과 자체 아키텍처(구성 방식)인 x86 칩 등을 포함한 다양한 칩을 제조할 것”이라며 “아마존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퀄컴 같은 회사가 인텔의 소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티아 나델라 MS CEO도 인텔을 지지하기 위해 이날 발표에 나타났다. 파운드리 부서는 현재 인텔의 수석 부사장인 란디르 타쿠르가 이끌게 된다.

인텔은 경쟁사의 중앙처리장치(CPU) 아키텍처도 제조할 수 있다고 밝히며 적극적인 시장 진출 의지를 밝혔다. 심지어 다른 공장에서 제조한 웨이퍼(반도체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에 대해서도 백엔드(후공정) 조립과 테스트 서비스를 할 수 있으며,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처럼 특정 칩을 개발해야 할 경우 인텔이 참여해 맞춤형 디자인과 새로운 제조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인텔은 현재 미국에서 ‘웨이퍼 팹’이라고 불리는 공장 네 곳을 매사추세츠주와 뉴멕시코주, 오리건주, 애리조나주에서 운영하고 있다.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 선언은 2월 2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제조가 정부의 최우선 과제”라며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검토 행정명령을 내린 지 한 달 만에 나온 것이다. 미국 상무부는 즉각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 발표 환영 성명을 내고 “미국의 기술 혁신과 리더십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며 “반도체 공급망의 안전성과 회복 탄력성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 및 국가 안보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강국 굳히기에 미국의 민관이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은 아시아에 집중된 기술 균형을 미국으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할 것(로이터)”이라는 분석과 맥이 닿는다.


올해 2월 취임한 인텔의 팻 겔싱어 CEO. 사진 블룸버그
올해 2월 취임한 인텔의 팻 겔싱어 CEO.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1
“과거의 인텔이 새로운 인텔”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인텔 최연소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이다. 1987년부터 1998년까지 인텔 CEO를 지내며 회사를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시킨 앤디 그로브 시절을 경험했다. 겔싱어 CEO는 이번 글로벌 미디어 브리핑에서 앞으로 인텔의 제조 전략과 사업 전략을 ‘그로비안 문화(Grovian culture)’로의 회귀라고 말했다.

“오직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남긴 그로브 전 CEO의 완벽주의 성향을 닮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겔싱어 CEO는 18세였던 1979년 인텔에 입사해 30년 동안 근무한 ‘원조 인텔맨’이다.

2009년 저장 기기 업체 EMC로 옮기며 인텔을 떠난 그는 VM웨어를 거쳐 12년 만에 인텔 CEO로 복귀했다. 그만큼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겔싱어 CEO는 “인텔이 돌아왔다. 이제 과거의 인텔이 새로운 인텔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과거 압도적인 경쟁력을 보여줬던 인텔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세계 파운드리 2위 삼성전자. 사진 연합뉴스
세계 파운드리 2위 삼성전자. 사진 연합뉴스

연결 포인트 2
TSMC와 삼성도 투자 확대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은 대만 TSMC와 삼성전자에 대한 도전이다. 팻 겔싱어 인텔 CEO가 “아시아에 편중된 파운드리 서비스의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연내 미국과 유럽 등에 추가로 공장 확장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밝힌 것도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인텔의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얘기다.

시장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올해 1분기(예상치) 기준으로 TSMC의 시장 점유율은 56%에 이르고, 삼성전자는 18%를 차지한다. 다만, 단기간에 시장을 뒤흔들 순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찰스 셤 애널리스트는 “애플과 퀄컴 등 잠재적인 파운드리 소비자가 인텔과 경쟁 관계여서 주문을 꺼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TSMC가 올해 250억~280억달러(약 28조2500억~31조6400억원) 규모의 설비 투자를 계획하고 삼성전자가 미국 파운드리 공장 신증설에 170억달러(약 19조2100억원)를  투자할 것으로 알려지는 등 선발 주자들의 투자 확대도 만만치 않다.


스페인 세아트의 쿠프라 모멘토 생산 현장. 사진 블룸버그
스페인 세아트의 쿠프라 모멘토 생산 현장.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3
美·유럽·日 공급망 안정 경쟁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전자제품 수요가 늘고, 자동차 탑재 반도체가 증가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부족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선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자동차 반도체 칩 공급 3위였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의 웨이퍼 팹 가동이 중단된 이후 10년 만에 나타난 ‘공급망 충격’이라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2분기에도 계속 같은 문제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동차 업계도 반도체 부족의 악영향을 받고 있다. 혼다와 폴크스바겐은 북미 지역 대부분의 공장에서 일시적으로 생산을 중단할 위기에 처했다고 최근 밝혔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에 들어가고 인텔이 200억달러 투자를 결정한 것이나, 유럽연합(EU)이 반도체 자급 생산을 늘리는 내용의 디지털 전환 로드맵을 3월 9일 내놓고, 일본이 3월 23일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 체제를 정비한다고 발표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