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작가 더글라스 쿠플랜드의 범고래 모양 조각이 서있는 밴쿠버 컨벤션센터 앞 풍경 <사진:블룸버그>
캐나다 작가 더글라스 쿠플랜드의 범고래 모양 조각이 서있는 밴쿠버 컨벤션센터 앞 풍경 <사진:블룸버그>

‘주부들을 위한 포르노’라 불리는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잭 스나이더 감독의 수퍼맨 영화 ‘맨 오브 스틸’의 공통점은 뭘까.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 두 영화지만 모두 캐나다 서부 최대 도시 밴쿠버가 주된 촬영지였다는 점이 같다.

캐나다는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 제작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다. 특히 각각 동부와 서부의 대표 도시인 토론토와 밴쿠버는 오랫동안 ‘북쪽 할리우드(Hollywood North)’라는 별칭을 나눠 가지며 할리우드 영화산업 발전에 큰 몫을 했다. 그런데 최근들어 무게 중심의 축이 밴쿠버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할리우드와 지리적 인접성을 앞세운 밴쿠버는 영화는 물론 미국의 인기 TV 시리즈 제작 유치 건수를 꾸준히 늘리며 인구가 2배 이상 많은 라이벌 토론토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오는 8월 25일 국내 개봉 예정인 ‘스타트렉 비욘드’를 필두로 2018년 개봉 예정인 워너브라더스의 새로운 수퍼히어로 영화 ‘플래시’ 등 굵직한 작품들이 밴쿠버 일원을 배경으로 촬영을 마쳤거나 준비 중이다.


스트리밍 영화 제작 1년 새 4배 늘어

‘플래시’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찰스 리알(Charles Lyall)은 캐나다 일간지 글로브앤메일과의 인터뷰에서 “(경도가 할리우드와 같아) 시차 적응을 위한 노력 없이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고 주말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며 할리우드와 가까운 밴쿠버의 지리적 장점을 설명했다. 토론토와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LA) 사이에는 3시간의 시차가 있을 정도로 거리가 멀다. 최근 혜택폭이 줄기는 했지만 브리티시컬럼비아주정부가 영상물 제작 산업에 세금 공제(tax credit)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할리우드 영상물 제작 유치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정부는 2015~2016년 영상물 제작 관련 세금 공제 액수가 5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이 같은 장점을 등에 업은 밴쿠버는 2014~2015년 영화와 TV 영상물 제작 관련 활동이 40%나 증가하는 등 ‘북쪽의 할리우드’를 넘어 ‘캐나다의 할리우드’로 자리매김할 준비를 마쳤다.

급성장의 중심에는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 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 훌루 등 스트리밍 업체들의 자체 영상물 제작붐이 불면서 북미의 영상물 제작 허브로서 밴쿠버의 위상은 더욱 굳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디지털·영상 산업을 관장하는 정부 기관인 크리에이티브 BC의 최근 보도자료를 보면, 지난해 3건에 불과했던 관내 스트리밍 영상물 제작 건수는 올해 들어 6월 초까지 12건으로 늘었다. 특히 업계 1위 넷플릭스는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5편의 TV 시리즈와 2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는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코미디 배우 짐 캐리 주연의 가족 영화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의 ‘미드’판 ‘위험한 대결(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과 동명의 사이버펑크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새 시리즈 ‘얼터드 카본(Altered Carbon)’ 등이 포함돼 있다. 경쟁사인 아마존과 훌루도 각각 우디 앨런 감독의 첫 TV 시리즈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의 2번째 시즌과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셧아이(Shut Eye)’의 제작을 밴쿠버와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진행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부촌인 로스 카토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넷플릭스가 밴쿠버에 주목하는 이유도 기존 할리우드 제작사와 다르지 않다. 넷플릭스는 올해 2월 할리우드의 14층짜리 선셋 브론슨 스튜디오 전체에 대한 임대 계약을 마치면서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선셋 브론슨 스튜디오는 과거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가 있던 자리에 있다.

넷플릭스는 2013년 자체 프로그램 제작을 시작해 어느덧 제작 분량을 기준으로 미국 최대 케이블 방송사 HBO를 넘어섰다.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57)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월 1분기 실적발표 자리에서 가입자수가 8150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4분기 7480만명에서 670만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그는 당시 넷플릭스의 가입자수가 내년까지 1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다.

넷플릭스가 올여름 밴쿠버에서 촬영을 시작하는 영화들 중에는 일본 만화 원작의 할리우드 영화 ‘데스노트’와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옥자’도 있다. ‘데스노트’는 일본만화가 오바타 다케시의 동명의 인기 만화가 원작이다. 일본에서만 3000만부 이상 팔리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35개국에서 번역됐다. 2006년 일본에서 실사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이번 미국판에서 남자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는 ‘안녕 헤이즐’의 냇 울프가, 아마네 미사는 마가렛 퀄리가 맡는다.

‘옥자’는 미자(안서현)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미국 기업의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거대 동물 ‘옥자’가 다국적 기업에 의해 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할, 폴 다노, 릴리 콜린스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다. 내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며 국내 극장 개봉도 논의 중이다.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서울·광주·김포·대전 등 전국 각지를 돌며 국내 촬영을 마쳤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데드풀’의 밴쿠버 촬영 장면 <사진 : 20세기 폭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데드풀’의 밴쿠버 촬영 장면 <사진 : 20세기 폭스>

‘수퍼내추럴’ 촬영으로 5800억원 경제 효과

‘데스노트’의 촬영 로케이션 담당 한스 다얄은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앞다퉈 여기서 촬영을 하니 도시 전체가 들떠있다”며 “이런 분위기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관련 기업들이 얼마나 오래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전했다.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 제작이 붐을 이루면서 도시 전체가 누리는 경제 효과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 개봉한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19금’ 액션 영화 ‘데드풀’의 제작진은 밴쿠버 촬영 당시 스태프와 진행요원, 단역배우 등 2000명이 넘는 현지인들을 고용했다. ‘수퍼내추럴’의 첫 촬영이 시작된 2005년 이후 지금까지 밴쿠버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가 누린 경제효과는 5억달러(약 5800억원)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데드풀’은 암 치료를 위해 비밀 실험에 참여했던 용병 출신 웨이드 윌슨이 자가 재생능력(힐링 팩터)을 얻어 복면 히어로 데드풀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은 액션 영화다. 수퍼히어로 영화로는 드문 ‘R등급(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지만 전 세계 60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석권하며 7억6330만달러의 수익을 올릴 만큼 폭발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뉴욕 맨해튼을 닮은 토론토의 금융중심가 베이스트리트(Bay Street)의 모습 <사진: 블룸버그>
뉴욕 맨해튼을 닮은 토론토의 금융중심가 베이스트리트(Bay Street)의 모습 <사진: 블룸버그>

캐나다 영상산업 할리우드 종속 우려도

할리우드 작품을 매개로 한 밴쿠버 영상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애니메이션과 특수효과 등 인접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산업의 경우 할리우드 제작물 관련 일거리가 몰리면서 바델(Bardel) 엔터테인먼트 등 현지 주요 애니메이션 전문 업체들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3년간 관련 분야 전문 인력의 급여도 꾸준히 상승했다.

캐나다 애니메이션 전문가의 연 수입은 평사원의 경우 2만7000~3만1000달러, 관리자급은 4만7000~5만9000달러 정도다. 바델의 인사 담당자인 스콧 핸리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밴쿠버는 시각효과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세계 3대 허브로 성장했기 때문에 늘 우수한 인력을 채용하려는 사람들이 몰린다”고 말했다. 영화 촬영지로 밴쿠버의 한계도 물론 있다. 밴쿠버의 인구(광역권 포함)는 약 250만명으로 토론토(600만)나 몬트리올(400만)에 훨씬 못 미친다. 도심의 규모 자체가 작은데 촬영 수요가 늘다 보니 시청사 등 인기 촬영 장소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도심 풍경도 상대적으로 단조로워서 같은 풍경이 밴쿠버에서 촬영한 여러 다른 영화에 되풀이해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얄도 “밴쿠버의 매력은 변함없겠지만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에 한계가 있다”며 “고층건물이 40~5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시카고 같은 느낌을 주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체 영상 산업 관련 시설과 인력의 상당 부분이 할리우드 작품 제작에 투입되고 있다 보니 경쟁력 있는 자체 영상물을 만들기는 오히려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처럼 할리우드 자본이 몰려들 때 제대로 된 자체 제작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인력 부족으로 쉽지 않다.

투자 열기가 시들해지면 인력은 있어도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을 테니 또 문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캐나다 영상 산업이 할리우드에 종속되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