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上海)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베이징(北京)과는 다르다. 세계와 통하는 창구답게 상하이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라면, 정치 중심지인 베이징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92년 2월은 중국이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하기로 방향을 결정한 지 13년 남짓 되는 때였다. 중국 경제의 각 부문에 외국에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FDI(해외직접투자)로 불이 붙기 시작한 때였다. 밀려들어오는 외국 자본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미국과 유럽의 문화에 묻어 들어온 정치적 자유주의에 ‘감염(?)’된 베이징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봄과 여름이 교차하던 그해 5월 천안문광장에서 한 달 넘게 반(反) 부패와 민주주의 요구 시위 끝에 인민해방군에 유혈 진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그런 정치적 혼란은 당시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정적(政敵) 천윈(陳雲)이 이끄는 보수파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줘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이끄는 베이징의 여론은 “지나치게 빠른 경제 성장은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위험하게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다.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이 위기에 직면한 것을 본, 88세의 덩샤오핑은 지팡이를 짚고 상하이로 달려갔다.

(좌) 베이징 당중앙위의 조사를 받고 있는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우)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조사는 상하이 측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진은 2012년 8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3차 신장위구르 지원 공작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당시 부주석(맨 왼쪽)과 저우융캉 상무위원.(왼쪽 두 번째)
(좌) 베이징 당중앙위의 조사를 받고 있는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우)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조사는 상하이 측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진은 2012년 8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3차 신장위구르 지원 공작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당시 부주석(맨 왼쪽)과 저우융캉 상무위원.(왼쪽 두 번째)

덩샤오핑, 상하이와 손잡고 개혁·개방 위기 극복
중국 공산당은 지난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創黨)됐고, 초기 당기관지는 현재도 상하이에서 발행되고 있는 해방일보(解放日報)였다. 당시 덩샤오핑의 자극을 받은 해방일보는 ‘황부핑(黃甫平)’이라는 가명의 필자가 쓰는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황부핑 평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해방일보 칼럼은 “기회를 잡았을 때 거침없이 쾌속 발전해나가자”는 논조를 연일 발표, 베이징 인민일보의 안정 성장론에 맞섰다. 노구를 이끈 덩샤오핑의 발길은 선전(), 광저우(廣州), 주하이(珠海)를 비롯해 남부의 경제특구들을 차례로 돌았고, 현지 여론은 일제히 “잘 사는 국가를 향한 쾌속 성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몰려갔다. 나중에 ‘남순강화(南巡講話)’라는 이름이 붙여진 당시 덩샤오핑의 여행은 보수파 천윈과 리펑(李鵬) 총리가 중심이 된 안정 성장론을 넘어서, 중국 경제가 다시 쾌속 성장의 길로 들어서는 것으로 끝마쳤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결, 인민일보와 해방일보의 대결은 상하이와 해방일보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지난 7월29일 반(反)부패 드라이브를 건 시진핑(習近平) 당총서기의 회심의 한 수인,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당 차원의 조사(사실상의 수사)에 관련된 상하이의 반응은 그래서 중요했다. 더구나 저우융캉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첫 번째 후계자로, 상하이 당서기와 시장 출신의 장쩌민(澤民) 사람이라는 점에서 상하이의 반응은 시진핑에게는 정치적 운명이 걸린 폭풍의 언덕인 셈이었다.

한정(韓正) 당서기가 이끄는 상하이시 당위원회는 7월30일 오전부터 베이징 당중앙이 상하이 인근 장쑤(江蘇)성 출신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에 나서면서 상하이시 당위원회에 통보한 내용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기 위한 마라톤 회의에 들어갔다. 상하이 시당위원회는 회의 8일째인 8월6일 마침내 “베이징 당위원회의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 착수에 대한 결정을 확고히 옹호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상하이 시당위원회의 결정을 본 충칭(重慶), 톈진(天津) 등 직할시(우리의 광역시에 해당)들이 잇달아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전국 23개 성과 직할시, 자치구 가운데 18개 성과 직할시가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흐름으로 정리됐다.

베이징의 당중앙과 인민일보가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의 정당성을 발표하고 나선 지 11일만인 8월8일 해방일보는 “부패 분자의 직위가 높고 명성이 높을수록 더욱 확고한 자세로 청제(淸除·청소와 제거)에 나서야 한다”는 제목의 평론을 발표했다.

“사욕(私慾)을 부풀리고, 권력을 남용해서 사리(私利)를 취하는 분자들이 흔히 하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계산과, 자신은 보험 상자(세이프티 박스)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각’이라는 인민일보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다. 문제의 고관들과 관원들은 다시는 황량미몽(黃粱美夢·덧없이 아름다운 꿈)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흐름이 이렇게 잡히자 외국인과는 정치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겠다던 상하이 사람들도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부패에 무슨 성역(聖域)이 있을 수 있느냐… 오래 된 종양은 칼로 찢어야 한다…조사받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탐관오리들이 일종의 자아 위로적 마취제를 맞고 환각 상태에 빠진 것” 등등의 말을 했다.

- 중국 근·현대사에서 베이징과 상하이는 견제와 협력을 반복해왔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역대 지도자 사진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한 상하이 시민.
- 중국 근·현대사에서 베이징과 상하이는 견제와 협력을 반복해왔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역대 지도자 사진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한 상하이 시민.

해방일보, 연일 관리 부패 기사 다뤄
이와 함께 해방일보는 당시 부패 관리들의 이야기,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이저우(貴州)성 창순(長順)현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겸 계획국장이라는 인물이 몰래 빼낸 공금 40만 위안(약 7000만원)을 소지하고 다니다가 도둑에게 절도당한 이야기며,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당기율위원회 서기라는 인물이 뇌물로 받은 돈 40여만 위안을 철관음(鐵觀音) 차를 담은 종이상자에 넣어 다니다가 잊어버리고 상자를 폐품으로 팔아버린 이야기 등 부패 관리들이 망한 스토리들을 화제로 삼았다. 그러는 가운데 한 전국 여론조사는 46.3%의 응답자들이 “저우융캉 사건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능한 빨리 조사 결과를 발표해 달라”는 지지를 보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