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吉林)성 남부 퉁화(通化)시의 국영 철강기업 퉁화철강의 제조공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중국 지린(吉林)성 남부 퉁화(通化)시의 국영 철강기업 퉁화철강의 제조공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중국과 미국의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문제 삼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중국산 수입품에 4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표했다. 미국 상무부가 6월 3일 발표한 미국의 4월 대(對)중국 무역적자는 243억달러(약 28조1000억원)로 전월 대비 16.3% 증가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세계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공약과 관계없이 두 나라의 총성 없는 무역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만 세계무역기구(WTO)에 중국을 12번이나 제소했다. 역대 미국 행정부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다.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분야는 철강산업이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생산을 급격히 늘리면서 미국 철강산업에 큰 피해를 줬고, 미국은 400~500%에 달하는 반덤핑관세로 맞불을 놓았다.

2000년 연간 1억2800만t이던 중국의 철강 생산은 2014년 8억2200만t으로 7배 가까이 늘었다. 값싼 중국산 철강재가 미국에 급속히 유입되면서 미국 철강업계는 같은 기간 수십억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미국 상무부는 추산하고 있다. 토머스 깁슨 미 철강협회 회장은 지난 4월 미 상무부 등이 개최한 공청회에서 “2015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 철강업계에서 1만35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며 “가만히 있다가는 미국 철강업계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달 미국 1위 철강업체 US스틸은 미국 내 공장 2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과잉생산으로 中 철강업계도 수익 악화

그렇다고 중국의 철강 과잉생산이 자국 경제에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중국 철강협회 산하 101개 회원사 중 51곳이 지난해 적자를 냈을 만큼 수익성이 나빠졌다. 과잉생산은 환경 오염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홍콩의 영문 뉴스포털 아시아타임스는 이와 관련해 최근 “중국 정부의 환경 기준이 느슨한 편인데도 중국 철강업체의 75%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이어 “중국 철강 생산의 중심지인 허베이(河北) 성이 스모그로 악명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중국은 철강 생산을 줄이겠다고 여러 번 공언했었다. 지난 2월에는 연간 생산량을 5년 안에 1억∼1억5000만t줄인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감산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국 철강협회가 발표한 3월 철강 생산량은 7065만t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4월 들어 전체 생산량은 다소 줄었지만 휴일을 제외한 일평균 생산량은 231만4000t으로 3월(227만9000t)보다 오히려 많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 상무부는 5월 17일 중국산 냉연강판에 522%의 반덤핑관세를, 25일엔 중국산 내부식성 철강 제품(도금판재류)에 최대 451%의 반덤핑관세를 각각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5월 26일에는 미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중국 최대 철강업체인 바오강(寶鋼)그룹과 안산(鞍山)철강 등을 포함한 40개 업체를 가격 담합 등의 혐의로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중국 철강업체들이 해킹 등 부당한 방식으로 이익을 챙겼다는 US스틸의 제소를 받아들여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혐의가 확정되면 해당 물품에 대한 수입 배제 명령(exclusion order)과 유통 중인 제품의 압류 및 판매 정지 명령까지 내릴 수 있게 된다.

중국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중국 상무부는 이튿날 성명을 통해 “미국이 전면적인 철강 무역전쟁을 선포했다”며 “WTO의 관련 규정을 근거로 중국 철강 기업이 정당한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지 크게 보기

중국 상품 관세폭탄은 미국에도 ‘자살골’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는 6월 6∼7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열린 연례 양자 고위급회담인 제8차 전략경제대화에서 무역과 위안화 환율문제 등 민감한 현안을 놓고 맞붙었다.

중국은 최근 양국 간 교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철강 과잉생산 문제에 대해 생산을 대폭 감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원론 수준의 언급이지만 제이컵 루 미국 재무장관은 7일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국내 정책의 방향을 바꾸겠다고 약속한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6일 개막식에서 “중국이 철강재를 과잉생산하면서 글로벌 시장질서를 왜곡하며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는 등 손해를 끼치고 있다”고 성토한 것을 생각하면 한층 누그러진 반응이다. 반면 신화통신을 비롯한 중국의 주요 언론매체는 철강 감산이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중국은 미국이 문제 삼고 있는 외환시장 개입 논란에 대해서도 위안화 가치의 인위적 절하를 자제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자세를 낮췄다. 또한 2500억위안(약 45조원) 규모로 홍콩(2700억위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위안화 적격기관투자자(RQFII) 한도를 미국에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중국도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신흥국가들의 지분을 높이는 방향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등 실속을 챙겼다.

철강 분쟁으로 시작된 두 나라 간 무역전쟁은 오는 11월 치러질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당선되더라도 자국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면서까지 중국에 엄청난 관세 폭탄을 안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최대 수입국인 미국과 최대 교역국 중국의 경제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긴밀히 엮여 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는 미국 경제에도 ‘자살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인이 중국산 제품을 구매하며 지불하는 비용의 절반 이상은 제품의 운송과 판매, 홍보 등을 담당한 미국인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높은 관세를 매겨 제품값이 오르고 판매가 줄면 미국 경제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로버트 로런스 하버드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공약대로 중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 250달러짜리 트럼프 양복 가격이 350달러 이상으로 오르면서 트럼프의 사업도 타격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공약한 ‘관세폭탄’은 특히 미국에서 경제 규모, 인구수, 농업 생산량이 가장 큰 캘리포니아주의 경제에 독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제리 니켈스버그 UCLA 앤더슨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컨테이너 물량의 40%는 캘리포니아주를 거쳐 갈 만큼 캘리포니아 지역 경제의 국제무역 의존도는 높다”며 트럼프가 관련 공약을 밀어붙일 경우 지역 경제에 충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했다.


keyword

위안화적격외국인투자자(RQFII) 중국이 해외 투자자들에게 위안화로 중국 자본시장에 곧바로 투자할 수 있게 허용한 제도. 중국은 역외의 특정지역에 소재하면서 RQFII 자격을 부여받은 해외 금융기관에 한해 중국 본국 금융상품에 위안화로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