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의 유서 깊은 배갈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1. 낭야대 진시황 조각상 2. 낭야대 전각 3. 낭야대 원주 저장고
1. 낭야대 진시황 조각상 2. 낭야대 전각 3. 낭야대 원주 저장고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칭다오(靑島)는 중국인들에게 ‘살고 싶은 도시’ 1, 2위로 꼽힐 만큼 선망의 도시다. 서구의 도시들 못잖게 잘 정비된 가도가 사통팔달할 뿐만 아니라 명산 라오산(山)과 황해 바다를 끼고 있는 자연 풍광이 지극히 아름답다. 사계절이 뚜렷하며 햇빛이 풍부하다. 발달한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환경오염이 적어 공기가 맑다. 대륙을 탐했던 서구인들이 일찌감치 이곳에다 자신들의 거처를 정했던 까닭도 이런 천혜의 자연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새 이곳에는 코리아타운이 조성될 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오가고 있다. 그 사이, 이곳을 대표하는 칭다오맥주 역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의 하나가 됐지만 칭다오의 토종 배갈 ‘낭야대주(琅台酒, 랑야타이 주)’를 찾아 마시는 한국인들은 아직 많은 편이 아니다. 때문에 칭다오에 와서도 마오타이나 우량예 같은 배갈만 찾는 한국의 애주가들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청도인도 더러 있다.

- 낭야대주 술병
- 낭야대주 술병

월왕 구천과 진시황의 숨결이 남아 있는 낭야대

낭야대주의 술 이름은 역사 명소 낭야대(琅台)에서 유래됐다. 칭다오의 시가는 바다가 내륙으로 파고 든 만(灣)의 연안에 펼쳐져 있는데 바닷가에서 건너다보이는 반도가 바로 낭야대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도 교남시 낭야진(靑島 膠南市 琅鎭)이다. 중국의 고대 기서(奇書) <산해경(山海經)>에도 “낭야대는 발해의 사이, 낭야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사서에 따르면 낭야대는 춘추전국시대 월왕(越王) 구천(勾)에 의해 처음 축조됐다.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은 와신상담 끝에 오(吳)를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됐으며 기원전 472년 수도를 낭야로 옮겼다. 이때 성 동남쪽에 낭야대를 세웠다. 또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19년 동쪽의 여러 군현을 시찰할 때 낭야를 찾았으며 이때 천지의 신들을 받드는 신전을 건립했다. 이후 여러 번 대를 증축해 마침내 함곡 바깥에서는 가장 큰 궁전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낭야대 행궁이다.

낭야대 술의 역사는 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술은 춘추전국시대에 시작해 진한시대에 발전의 전기를 맞았으며 당송시대에 크게 융성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낭야대 바로 아래에 있는 샘의 물로 술을 빚으면 그 향기가 극진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찬란한 제(齊)와 노(魯)의 문화가 꽃피었던 이곳이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면서 술 문화를 꽃피우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낭야대 술은 월왕 구천에 의해 빚어졌다. 수도를 낭야로 옮길 무렵 구천은 오월(吳越)의 전통 양조법까지 이곳으로 이전했다. 낭야의 백성들은 구천이 전해준 양조법과 낭야산 샘물로 술을 빚어 구천에게 바쳤는데 이 시기의 술이 ‘낭야홍(琅)’이었다. 월왕 구천은 자주 낭야대에 올라 고향을 그리워했을 뿐만 아니라 경축일을 맞을 때마다 대신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잔치를 벌였으며 낭야홍 술을 마셨다. 왕과 신하가 그러하니 민간에서도 잔칫날이면 낭야홍을 진탕으로 마시는 풍조가 생겼으며 이는 낭야의 술 산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6국을 멸하고 통일된 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낭야 땅에 낭야군을 설치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고 대진(大秦)의 위의를 떨치기 위해 전국을 순유(巡遊)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다섯 번에 걸쳐 천하를 순유하며 세 번이나 낭야를 찾았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대군을 거느리고 수도 함양(咸陽)을 출발해 처음으로 낭야에 닿았다. 대에 오르자 망망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황제는 이 풍경에 크게 감동해 3개월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풍광에 취해 돌아감을 잊은 황제는 낭야를 번성시키기 위해 내지로부터 3만 호의 백성을 이곳으로 이주시켰으며 월왕 구천이 쌓았던 대를 허물고 위용이 넘치는 새로운 전각을 세웠다. 방사(方士) 서복(徐福)에게 수천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딸려 보내 불로장생약을 찾게 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기원전 218년과 210년에도 진시황은 이곳을 찾았다. 세 차례에 걸친 진시황의 낭야대 방문은 낭야의 경제와 술 문화 발전에 중대한 촉진제가 됐다.

고대에는 인구가 적고 생산력이 부족한 것이 경제 발전에 가장 큰 장애였다. 3만 호의 백성을 낭야로 이주시킨 진시황은 이들에게 12년 동안 부역을 면해 주었다. 낭야는 새로 얻은 풍부한 노동력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전에 없던 번영을 누렸다. 이로써 나라의 창고에 곡식으로 가득 차고 집집마다 양식이 남아돌게 되었는데 이는 곧 대규모 양조업을 가능케 하였다.

진시황의 세 차례에 걸친 순유는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당시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청동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지만 점차 철기 생산도 늘어나고 있던 때에 황제가 동쪽을 여행함에 따라 중앙의 선진 기술들이 낭야까지 전해짐으로 해서 낭야의 생산력은 전국 수준으로 향상됐다. 또한 진시황의 남다른 구선(求仙) 활동은 낭야 술의 풍요를 약속하는 계기가 됐다.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겠다는 황제의 기원은 영원한 국가 통치를 위한 것이었는데 진시황에게 낭야는 신선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됐다. 때문에 그는 세 차례나 낭야를 찾았으며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곳엔 또 방사 서복이 있었다. 

낭야가 바로 서복의 출생지이다. 서복의 조상이 월왕 구천의 궁에서 술을 만든 장인이었으며 서복 때에 이미 집안의 양조업은 8대 250년에 이르고 있었다. 서복은 스스로 선대의 양조 기술을 잇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무속, 그리고 항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잡가(雜家) 대사였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이 낭야로 왔을 때, 서복은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가 원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바다 저 밖에는 봉래, 방장, 영주라고 하는 세 개의 선산(仙山)이 있으며 그 산에서 나는 선약을 술에 넣어 마시면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글을 써서 바쳤다. 아울러 자기 집안에서 만든 술을 올리면서 신선이 일러준 비방으로 만든 이 술을 마시면 사람의 수명이 연장된다고 황제를 홀렸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며 좌우 신하에게 술맛을 보게 하였는데 과연 술 향기가 짙고 맑으며 맛이 달고 그윽하여 가슴 깊이 감동을 주는 신선주와 같았다. 진시황은 칭찬과 함께 큰 상을 내렸으며 이후 이 술은 궁정 전용주가 되었다. ‘낭야대 어주’란 칭호를 얻은 것도 이때였다. 황제는 장생을 기원할 때 또 신하들과 잔치를 벌일 때면 꼭 이 술을 마셨다. 바다 너머에 선산이 있다는 서복의 말에도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후 진시황은 서복에게 양조 장인들의 훈련을 맡겼으며 양조장의 생산 규모를 확대했다. 한편으로 큰 배를 만드는 일에도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먼 바다 항해 준비가 완료되자 서복은 동남동녀를 태우고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바다로 나섰다.

- 낭야대주
- 낭야대주

낭야대주는 청도인들의 자존심

고고학적 성과에서도 진한시기 낭야대 술 산업의 번영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신 중국 수립 후 고고학자들은 낭야대와 그 부근을 발굴 조사해 300여 점의 유물들을 얻었는데 그 중 30여 점이 술과 관계된 것이었다. 또 근래 고고학자들은 진대에 만들어진 도자 수도관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산꼭대기에서부터 산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고증 결과 이는 산 위의 샘물을 끌어내려 술의 용수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진한시기 낭야 지역의 양조업이 비상하게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송 시기는 중국 봉건사회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경제는 말할 것 없고 농업, 과학, 술, 문화 전반에 걸쳐 전에 없던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 낭야의 술 산업 또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자고로 중국의 문학은 술과 뗄 수 없는 법, 당송의 허다한 문화인들 즉 이백, 백거이, 이상은(李商隱), 소식(蘇軾)과 청대의 서화가 고봉한(高鳳翰), <속금병매>를 쓴 정요항(丁耀亢) 등이 낭야대에 올라 낭야의 술을 마시면서 작품을 남겼다.

북송 시기 낭야의 상업은 벌써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무렵 낭야 항(港)은 “해가 뜨면 1000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해가 지면 1만개의 등불이 켜진다”는 말이 생겨난 것처럼 중국 최대의 군항이며 어업기지가 됐다. 해운의 발달과 상업의 융성으로 낭야의 경제는 한층 더 발전했다. 이 같은 환경에서 낭야 술은 종전의 쌀을 이용한 발효주에서 증류주로 바뀌면서 질적인 대변화를 맞았다. ‘낭야 술의 혁명’이란 말이 있듯이 북송 시기의 낭야의 술은 이미 현대와 같은 풍미를 갖추게 됐다.

신 중국 수립 후 당과 정부는 전통의 기술 발굴 계승에 노력했는데 낭야대 술의 양조기술을 찾아낸 것도 그 일환이었다. 기존의 소규모 양조장들을 모아서 1958년 ‘교남주창(膠南酒廠)’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청도 낭야대 그룹’의 전신이다.

회사의 주 생산품은 ‘낭야대’ 브랜드의 배갈인데 이는 전통적인 농향형(濃香型) 배갈 제조 방식으로 빚어진다. 제품들은 ‘산동 명브랜드’의 칭호를 얻은 이후 산동성 10대 배갈의 하나가 됐으며 2006년 ‘중국 치명상표’의 승인을 받았다. ‘29° 홍매(紅梅)’, ‘38° 중화공(中華貢)’ 등의 제품이 특히 소비자들에게 사랑받았다. ‘화운(和韻)’, ‘화아(和雅)’ 등 ‘화(和)’ 계열 상품과 ‘청운랑(雲琅)’, ‘홍운랑(紅雲琅’ 등 ‘운랑(雲琅)’ 계열의 상품들도 시장 지배에 성공했다.

이들과 함께 나온 ‘70° 원주(原酒)’ ‘71° 소랑고(小琅高)’는 중국에서도 높은 도수 배갈의 원조가 됐다. ‘70° 원주’는 청도 낭야대 그룹이 전국 배갈업계에서 최초로 선보인 차별화 상품이었다. 이들 ‘70° 원주’와 ‘71° 소랑고’ 제품은 작은 포장에 고품질, 짙고 부드러운 맛, 도수는 높으나 쏘지 않는 특색 등으로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들 술이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은 청도인들의 안분지족하는 순박한 기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본성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이들은 술에 있어서도 낮은 도수의 것을 선호하는 버릇이 있었다. 낭야대 술 회사는 주민들의 이 같은 음주 습관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앞서 30도짜리 배갈을 출시했는데 술은 시장에 나가자마자 선풍적으로 팔려나갔다. 이후 30도 낭야대주는 10년 넘게 칭다오의 술 시장을 점령했으며 낭야대 계열의 술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브랜드가 됐다. 칭다오의 술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무슨 술을 드시겠어요?” “낭야대 30도짜리 주십시오.” 이처럼 30도 낭야대 술은 청도인들의 정서에 딱 들어맞는다.

한편, 칭다오 시민들 또한 중국의 여느 큰 도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온유함이 청도인들의 기질이라고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을 잘 떠벌리는 일면도 있다. 이는 환경이 좋은 현대적 도시로 이주해 온 시민들이 가지는 일반적 성향이기도 하며 청도인으로서 주체적인 긍지와 동질감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유행에 대해 민감하며 새로움에 대한 흡인력이 강렬하다. 때문에 값비싼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도 그들의 자연스러운 개성이 됐다.

주민들의 이러한 성향을 잘 파악한 술 회사에는 앞장서 고급제품을 개발 생산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70° 낭야대 원주(原酒)’였다. 이처럼 높은 도수의 배갈이 청도 사람들에게 팔린다는 사실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로 여겨질 정도였다. 온화한 칭따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높은 도수의 배갈을 좋아한단 말인가. 게다가 작은 병 하나에 40위안을 넘는 것을…. 이는 청도인들의 콧대 높음을 제대로 보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청도인들은 70도 배갈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으며 자랑스럽고 친절하게도 이 술을 ‘칭다오의 마오타이’라고 불러주기까지 했다. ‘칭다오=낭야대, 낭야대=칭다오’의 등식이 성립하는 것도 이러한 칭다오의 독특한 인문적 특색과 관련이 있으며 낭야대 술은 이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칭다오 해안
- 칭다오 해안

 

최학 소설가·우송대 교수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