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시민 시위대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국가선거관리위원회로 향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베네수엘라 시민 시위대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국가선거관리위원회로 향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2000여명의 시위대가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학생 시위대 한 명이 “지금 정부는 필사적으로 시민들을 제재하려고 한다. 나라를 재앙으로부터 구하려고 하는 시민들의 노력을 짓밟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지금 당장 소환투표를 원한다(Recall Vote Now)’는 플래카드가 쥐여 있었다.

유례 없는 극심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니콜라스 마두로(Nicolas Maduro)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날이 갈수록 거칠게 시위대를 진압하는 마두로 정부를 보며 베네수엘라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시민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이번 대국민소환투표가 무력화되고 마두로 정부의 사회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것이다.

5월 13일 마두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베네수엘라의 안전을 위해 국내외로부터 오는 모든 위협에 대응한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행보는 시민들의 반감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이유는 ‘생존을 위협하는 경제난’ 때문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5월 13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베네수엘라 시민들이 나라 곳곳에서 약탈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개·고양이·비둘기 등을 잡아먹기까지 하고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햄버거 1개가 1700볼리바르에 팔리고 있다. 베네수엘라 공식환율은 1달러당 약 10볼리바르로 1700볼리바르는 170달러(약 20만원)다. 기초적인 생필품과 식품을 구입하기 위해 시민들이 가게 앞에 수킬로미터씩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은 일상이 됐다.

시민들을 더욱 좌절시키는 것은 매일 줄을 서도 원하는 물품을 살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점이다. 상황이 날로 열악해지는 가운데 베네수엘라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에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국영 설탕 제조업체가 원당 부족을 이유로 생산을 중단하면서 탄산음료 제조사인 코카콜라 역시 베네수엘라에서 콜라 생산을 잠정 중단했다. 탄산음료 제조에 필요한 설탕 조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내년 물가상승률 2200% 예상

중남미 전문가들은 저유가로 촉발된 이번 베네수엘라 사태가 사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무상복지로 인한 재정적자, 원자재 수출 기반 경제의 위험성 등 경제위기의 위험 요소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전 대통령은 국제 유가 상승기인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서민을 위한 무상복지정책에 쏟았다. 1998년 49% 수준이던 빈곤율은 2012년 25%까지 떨어졌고, 덩달아 정부 재정도 급감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대외 부채는 1200억달러 수준으로 저유가가 계속된다면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만기 예정인 국채 원리금 상환액은 총 270억달러인데, 현재 베네수엘라의 외환보유액은 30억달러에 불과하다. 김지섭 코트라 카라카스 무역관은 “올해 10월과 11월만 해도 50억달러의 상환이 예정돼 있어 향후 유가 변동과 경제정책 운용 여부에 따라 상환 가능성이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자국 화폐인 볼리바르화를 찍어내고 있지만 화폐가치가 급락하면서 물가는 치솟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공식환율과 별개로 현재 암시장에서 통용되고 있는 볼리바르·달러 환율이 1달러당 1110볼리바르에서 올해 말 6699볼리바르까지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공식환율은 1달러당 약 10볼리바르(9.98볼리바르)다.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5% 줄고, 재정 수입은 70% 급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이 275%에 달한 데 이어 올해는 720%, 내년에는 2200%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5.7%였으며, 올해는 -8%로 전망된다.

빈민층에 무상복지를 제공하는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정책 기조는 마두로 대통령 집권 이후에도 이어졌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기존의 정책은 유지하고 사회간접자본과 석유 생산 효율성 향상을 위한 투자는 미뤄뒀다. 유가 급락으로 정부 재정이 바닥나고 볼리바르화 가치가 폭락하자 마두로 대통령은 5월 17일 휘발유 가격 인상과 화폐 가치 평가절하를 선언했다. 91옥탄가 휘발유 가격을 1ℓ당 0.07볼리바르에서 1볼리바르로 올리고, 95옥탄가 휘발유값을 1ℓ당 0.097볼리바르에서 6볼리바르로 인상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휘발유가 인상은 1996년 이후 20년 만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전력난까지 온 상태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2002년 집권 후 전기요금을 동결하고 전력소비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풍족한 자원을 믿고 전력을 마구 쓰도록 한 탓에 수요가 급증했지만 차베스 정부는 2007년 전력망을 국유화해 요금을 동결했다. 미국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베네수엘라의 전기 공급은 28% 늘었지만 수요는 49% 증가했다.


정부 지지자, 경제난에 반대파로

베네수엘라 현지 언론은 4월 27일(현지시각) 마두로 대통령이 전기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공공 부문 근로자들에게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만 출근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5월 1일에는 햇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표준시간대를 30분 빠르게 조정했다.

현재 마두로 대통령이 펼치고 있는 가격 통제 정책은 반(反)시장·반기업 정책으로 차비스모에서 비롯됐다. 이 정책은 기업들의 생산 의지를 꺾고 국민들을 생필품 대란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5월 14일 “부르주아들이 마비시킨 생산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며 “생산 중단으로 사보타주(태업)를 일삼는 기업인들은 수갑을 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공정가격법(Ley de Precio Justo)을 통해 청소용품, 개인위생용품, 식품 등 50여개 생활필수품 가격을 통제하자 기업들은 생산을 멈췄다.

김 무역관은 “(정부의 가격 통제로) 생산자 입장에선 판매가격이 생산비용에 비해 턱없이 낮아 제조업 가동률이 크게 낮아졌다”며 “그나마 생산되는 제품도 정식으로 판매되기보다는 암시장을 통해 시장가격에 맞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원호 한국외대 국제대학원 중남미학과 교수는 “차베스 정부의 무상복지로 가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나은 복지를 기대하게 됐다”며 “계속되는 경제난, 생필품 대란 등으로 정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사람들이 지금은 강한 반대파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현재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를 추진하고 있다.

국민소환투표 청원에 필요한 유권자 1%(20만명)를 훨씬 웃도는 185만명의 국민이 청원서에 서명했고 5월 2일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상태다. 베네수엘라 여론조사업체인 다타날리시스(Datanalisis)에 따르면 올해 안에 마두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은 70%에 달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반대파들의 움직임은 활발하지만 올해 안에 물러나진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Plus Point

우고 차베스식 포퓰리즘의 명암

1999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는 201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베네수엘라의 좌파정권을 이끌었다. 집권 후 2003년 석유법을 새로 제정해 과거에 일부 민영화됐던 석유사업을 전부 국가 독점으로 바꾼 후,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모두 빈민 복지에 쏟았다. 차베스 집권기에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이 베네수엘라에서 처음 진행됐고 빈곤층을 대상으로 무상주택과 기초식량이 보급됐다.

집권 시기 유가가 고공행진한 덕에 상당한 무상복지에도 베네수엘라는 평균 이상의 경제력을 유지했다. 차베스는 빈민층의 지지를 받은 반면 중상류층으로부터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석유 생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 사회간접자본 등 사회 인프라를 위한 투자 등을 전혀 하지 않았고, 산업 다변화에 대한 노력이 없었다는 점이 현재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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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비스모(Chavismo) ‘차베스주의’의 스페인어 표기.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사회주의적 이념을 의미한다. 주로 유물론적인 사회주의 요소와 포퓰리즘, 좌파민족주의 등 다양한 좌파적 이념이 결합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