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배갈의 3대 강호 ‘모오검’ 명성

- 검남춘 본사 건물
- 검남춘 본사 건물

  <일러두기> 

1.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2.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3.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 검남춘
- 검남춘

술 이름에 칼 ‘검(劍)’자가 든 탓에 상표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 바로 ‘검남춘(劍南春, 지옌난춘)’이다. ‘춘(春)’자 자체가 술을 뜻하기 때문에 따로 술 주(酒)자를 쓸 필요가 없지만 현지에서는 곧잘 ‘검남춘주’란 말도 쓴다.

흔히 중국 배갈 시장에서는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모오검(茅五劍)’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는 곧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3종의 고급 배갈, 즉 마오타이주(茅台酒), 우량예(五粮液), 검남춘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이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배갈이지만 중국에서는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특이한 술 이름은 지명에서 유래됐다. 당대(唐代)에 쓰촨성 북쪽을 가로지르는 검남산맥 이남에 새로운 도(道)를 설치하면서 명칭을 ‘검남도(劍南道)’라고 했기 때문이다.

검남춘은 이곳 미옌주현(綿竹縣)에서 생산된다. 면죽은 검남도에서도 가장 큰 고을의 하나였으며 예부터 술의 고향으로 소문이 났다. 쓰촨의 성도(省都) 청두(成都)에서 미옌주까지의 거리는 우리나라의 서울~천안 거리와 비슷하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이 정도 거리를 더 올라가면 다섯 살 때 서역에서 이주해 온 이백(李白)이 스무 살 때까지 살았던 쟝요우(江油) 시가 있고 그 위편에는 새들도 건너기 힘들었다는 천하 요새 검문(劍門)이 위치한다.

따라서 검남춘은 이백의 고향 술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그가 살았던 시기에 이름을 떨친 술이 바로 ‘검남소춘(劍南燒春)’이다. 소춘은 소주를 뜻한다. 일찍이 이백이 모피 옷을 저당잡히고 통음했다는 ‘해초속주(解貂贖酒)’의 일화도 이 술에서 비롯된다. 검남소춘은 당 덕종(德宗) 무렵 궁중에 들어가 어주(御酒)가 되었는데 이는 사천 명주들 중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송대(宋代)에는 벌꿀로 만든 밀주(蜜酒)가 유명했는데 ‘삼일 동안 항아리를 열어두면 향기가 성안에 가득하다(三日開瓮香滿城)’고 소동파가 시 <밀주가(蜜酒歌)>에서 칭찬한 술이 바로 이것이다. 

청대(代)에는 섬서성(陝西省) 사람 주욱(朱煜)이 이곳이 술 빚기에 좋은 곳임을 알아 주천익초방(朱天益酢坊)이라는 양조장을 열었고 뒤이어 양(楊), 백(白), 조(趙) 세 집안의 양조장이 연달아 술을 생산하면서 이곳 술은 면죽의 명산품이 되었다. 면죽의 술은 일정 부문 약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청나라 때 태사(太史)를 지낸 이조원(李調元)이 지은 <함해(函海)>의 기록 때문이다. ‘면죽의 술은 여름에 더위를 지워주고 겨울에 한기를 막아준다. 토사를 그치게 할 뿐 아니라 습하고 더운 지방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을 제거한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청대 말, 이곳에는 17집의 소주방이 있었고 1919년께는 25집으로 늘어났다. 이 무렵 술을 저장 발효하는 데 쓰이는 발효지만도 116개에 이르렀으며 연간 생산량은 최고 350여 톤에 달했다. 면죽의 소주는 1922년 사천성 진흥회에서 1등상을 받고 이어 1928년 사천성 물자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더욱 명성을 높였다. 이때 사람들은 ‘십리 거리에 면죽 술의 향기가 넘치니 세상 어느 누가 이를 모르랴?(十里聞香綿竹酒 天下何人不識君)’며 제 고장 술을 자랑했다.

1951년 신 중국 정부는 개인 양조장들을 바탕으로 해서 면죽주창(綿竹酒廠)을 건립했으며 1958년 현재의 검남춘주창(劍南春酒廠)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부터 술의 브랜드는 ‘검남춘(劍南春)’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날로 발전을 거듭한 검남춘은 1963년 ‘사천 명주’란 이름을 얻었고 1979년 제3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영예의 금장(金章)을 받아 ‘중국 명주’의 반열에 들었으며 이후 제4, 5회의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도 연이어 금장을 획득했다.

- 검남춘 회사는 8명의 주선을 조형물로 만들어 천향광장에 설치해뒀다.
- 검남춘 회사는 8명의 주선을 조형물로 만들어 천향광장에 설치해뒀다.

종려나무 그늘에서 익는 술 향기

좋은 샘물이 좋은 술을 낳는다는 말은 면죽의 술에도 그대로 통한다. 현지의 옛 기록에 따르면 ‘성 밖 서쪽의 샘물로 술을 만들면 향이 비할 수 없이 맑다’고 하였는데 이 샘물이 그 유명한 ‘제갈정(諸葛井)’이다. 삼국시대 말 위(魏)의 군대가 촉(蜀)으로 쳐들어왔을 때 제갈첨(諸葛瞻), 제갈상(諸葛) 부자가 성을 지키면서 이 우물물을 썼다는 고사에서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

서기 263년, 위나라 장수 등애(鄧艾)가 이끄는 군대가 촉을 공격해 왔을 때 제갈공명의 아들인 제갈첨은 지금의 면양(綿陽, 면죽의 이웃) 동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제갈상이 이끄는 선봉 부대가 위군에게 무너지자 그는 면죽으로 퇴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갈첨이 직접 병사를 끌고 나가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아들과 함께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으며 아들 제갈상은 겨우 17세였다. 이 우물의 유적은 현재도 검남춘의 용수를 대는 옥비천(玉妃泉) 가까이 있다.

검남춘은 수수, 쌀, 찹쌀, 옥수수, 밀을 원료로 하며 누룩은 밀로 만든다. 이들 곡식은 도시의 북쪽에 흐르는 카이강(凱江) 부근의 기름진 밭에서 생산된다. 이들 원료는 모두 나름의 특성이 있다. 특히 찰수수는 전분의 함량이 높고 점성이 크며 수분을 끌어들이는 성질이 강해 예부터 술 만드는 최고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쌀은 70% 이상의 전분을 함유하고 있는 데다 성질 자체가 순정하여 죽처럼 끈적끈적하게 하기 쉽다. 또 쌀로 만든 술은 상쾌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 특성이 있다. 찹쌀은 달콤한 향기와 함께 맛을 짙고 두텁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밀은 영양이 풍부할 뿐 아니라 술의 생산비율을 높이는 데도 유리하다. 옥수수는 영양이 많다는 장점이 있다.

중국 배갈의 광고와 상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자 ‘(쟈오)’는 술 원료를 발효시킬 때 쓰는 구덩이(토굴, 움)를 뜻하는데 이 발효지는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좋다고 한다. 오래된 ‘쟈오’일수록 향이 더 그윽해지고 맛이 순정해진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천익노호(天益老號)라고 불리는 검남춘의 발효 구덩이는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미생물의 독특한 생태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양조방법은 전통의 회사법(回沙法)을 따른다. ‘사(沙)’는 원료 수수의 다른 이름이다. 물에 불린 수수를 찌고 발효시켜 증류하고 여기서 걸러낸 지게미에 새 수수와 누룩을 섞어 다시 발효시키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술과 마찬가지로 검남춘도 걸러진 술들은 구분 저장되어 숙성과정을 거친다. 항아리에 담긴 이들 술은 종려나무 가지를 덮은 채 어둡고 싸늘한 방에서 오랜 시간 숙면하면서 깊고 짙은 향미를 만들어간다.

청두에서 미옌주로 가는 길.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스치는 마을마다 무너진 집들이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작업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발생한 쓰촨 대지진은 사망자만 8만6600명을 기록하는 대참사였다. 그로부터 반 년을 겨우 넘겨 타국의 한 글장이가 명주의 고향을 찾는답시고 참사의 중심지로 다가가고 있었으니 어찌 죄스러운 마음이 없었겠는가. 검남춘 회사가 있는 미옌주는 지진의 진앙지 원촨(汶川)의 지척에 있다. 원촨이 미옌주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50여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미옌주 역시 재난의 중심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술 회사의 형편조차 미리 파악하지 못했으니 취재가 가능한지에 대한 자신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백과 두보가 시간대를 달리 해서 이 길을 오가며 검남의 술을 즐기고 시를 읊은 일을 상상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다.   

두 시간여 만에 도착한 미옌주. 다행히 겉으로 보는 시가의 모습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게 멀쩡했다. 그러나 눈여겨보면 군데군데 펜스를 치고 복구공사를 하는 광경은 쉬 찾을 수 있었다.

시 외곽에 위치한 검남춘 본사 건물은 주위를 압도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번듯했다. 정문에서 찾아온 용건을 밝히자 건물 뒤쪽으로 가보라고 한다. 수십 채에 이르는 가건물들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기존의 건물이 지진 피해를 입어 전 회사 직원들이 이 가건물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곳곳에 피해 복구를 독려하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 천향광장 벽면에 새긴 소동파의 <밀주가>.
- 천향광장 벽면에 새긴 소동파의 <밀주가>.

8명의 ‘주선’ 내세운 홍보전략 눈길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던 회사 간부는 마침내 취재를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공장을 둘러보는 일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표정에서도 술 회사가 겪은 참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멀리서 공장 건물들을 바라보고 검남춘의 상징물인 천향광장(天香廣場)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관련 기사들을 참고하면, 대지진으로 검남춘 회사가 입은 직접 손실은 8억위안(약 1400억원)에 이르며 생산 중단에 따른 손실까지 합하면 최대 20억위안까지 치솟는다. 저장하고 있던 바탕 술(원주)의 독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져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여 톤의 술이 쏟아졌으며 술 냄새가 온 시가를 덮었다고 한다. 공장 밖으로 흘러나온 술은 근처의 큰 거리를 따라 강을 이뤘는데 많은 시민들이 그릇들을 가져와 흐르는 술을 담아가기도 했단다. 그렇지만 이들 술이 불씨를 만나면 뜻밖의 재앙을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회사에서는 신속히 차단선을 설치하고 안전하게 하수도로 흘려 보냈다.

술의 손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장 시스템이 완전 마비되었으며 수도와 전기, 환기, 통신 및 인터넷 시설이 전부 파손되었다. 32동이나 되는 직원 숙소가 붕괴 위험에 처해 대다수 사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진 후 3개월 동안 공정이 완전 중단됐으며 영업은 4개월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검남춘이 자랑하는 전통의 발효지 ‘천익노호’가 파손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2008년 당시 검남춘이 예상한 한 해 영업수익은 41억위안이었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해 25억위안의 영업수익을 거두는 것으로 그쳤다. 대지진 발생 1년이 지난 2009년 5월 검남춘의 시장 공급 기능은 60% 정도까지 회복했다.

분수 주위로 두보의 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나오는 여덟 술꾼들의 형상을 차려 놓은 천향광장에 서면 이 도시가 겪은 지진의 참상도, 술 회사가 입은 피해도 잠깐 먼 곳의 일로 느낄 수 있다.

검남춘은 이백의 옛 집이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빌려 일찌감치 이백을 술 광고에 앞세웠으며 두보와 면죽의 인연을 새겨 그의 음중팔선가를 원용한 상징물을 조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천향광장이다. 시문과 함께 이 지역에서 발굴한 고대 술그릇들을 소개하는 글을 새긴 벽면을 배경으로 한 채 분수 둘레에서 술과 시, 음악을 즐기는 여덟 주선(酒仙)들의 모습은 퍽 생동적이며 해학적이기도 하다. 

시에서 두보는 이들 여덟 인사의 술과 관련된 특징을 잘 그려놓고 있다. 술에 취해 곧잘 배를 탄 듯이 말을 타고 갔다는 하지장(賀知章, 이백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길에서도 누룩 수레를 보면 군침을 흘렸다는 여양왕 이진(李璡, 당 현종의 사촌), 탁주를 싫어하기로 유명한 좌상(左相) 이적지(李適之), 술이 부족하면 하늘을 흘겨보았다는 최종지(崔宗之, 시어사를 지냈다), 불자이면서도 술에 취하면 참선을 핑계로 잠을 잤다는 소진(蘇晉, 호부시랑을 지낸 문장가), 석 잔 술이면 초서(草書)의 성인이 됐다는 장욱(張旭), 다섯 말 술을 마셔야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했다는 초수(焦遂, 벼슬에 오른 바 없다), 그리고 여기에 이백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이백은 한 말 술에 백 편의 시를 짓고 (李白一斗詩百篇)

장안 저자 거리 술집에서 잠을 잤으며 (長安市上酒家眠)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天子呼來不上船)

스스로 술의 신선이라고 자랑하였다. (自稱臣是酒中仙
)

다른 이들은 두 연(聯)으로 그리면서도 굳이 이백에 대해서는 네 연을 할애한 것도 이백에 대한 두보의 존숭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이렇듯 자연스럽게 문학과 역사를 술과 연결시키고 그것을 즐기는 이들의 술 문화가 부럽기도 하다.

 

최학 소설가·우송대 교수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