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주와 삼화주

     

국가명주 버금가는 산동·계림의 보배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 공부가주
- 공부가주

마오타이주(茅台酒), 우량예(五粮液), 수정방(水井坊) 같이 이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중국 배갈은 그 높은 가격 때문에 탐이 나도 선뜻 손에 쥐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중국 현지에서 마오타이 한 병이 우리 돈으로 40만원 안팎에 거래되고 우량예, 수정방 또한 20만원에 가까운 탓이다. 따라서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때에도 저렴하면서도 포장이 화려한 마오타이, 우량예의 계열 상품이나 한 단계 급수가 낮은 품목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가짓수도 많고 구분도 싶지 않은 이들 마오타이, 우량예의 계열 상품에 대해서는 차후에 좀더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값비싼 몇몇 고급 배갈을 제외한다면 공부가주(孔府家酒), 계림삼화주(桂林三花酒), 주귀(酒鬼) 같은 술이 근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배갈이 될 듯싶다. 특히 공부가주와 삼화주는 중국 산동 지방과 계림 지역을 다녀오는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사정을 반영하듯 우리네 관광객의 인기 품목이 됐다. 그 덕에 필자 또한 일찌감치 공부가주며 삼화주 등을 마셔볼 기회를 가졌는데, 특히 용기와 포장이 인상적이었던 공부가주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짙은 갈색의 도자 병에 주둥이를 우리네 한지와 같은 종이로 덮고 노끈으로 묶은 이 술병은 제법 고풍스러운 아취를 풍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술맛이 썩 괜찮았다는 기억은 없다. 개인적인 취향 탓인지는 몰라도 향이 꽤나 자극적인 데다 주액 자체가 입안에서 미끈거린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 배갈 시장에서 자주 운위되는 얘기가 하나 있다. 1988년 마지막으로 개최되고 더 이상 열리지 않는 전국주류평가대회에 대한 아쉬움을 공부가주와 주귀를 제조하는 회사만큼 크게 가질 회사는 없다는 것이다. 신 중국 수립 후 다섯 번 열린 이 대회에서 한 번이라도 금상을 받은 술은 대회가 없어진 이후에도 두고두고 ‘국가 명주’의 칭호를 쓸 수 있는데 반해 회사의 짧은 연륜 때문에 좋은 술을 생산하면서도 대회에도 몇 번 참여치 못하고 그래서 국가 명주가 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 술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말이 아닐 수 없다. 다르게는 이들 술의 품질이 기존의 국가 명주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찬사도 될 수 있다.

- 취푸에서 거행되는 공묘제례(위 사진)와 공자 묘.
- 취푸에서 거행되는 공묘제례(위 사진)와 공자 묘.

● 공 부 가 주

공자 후손들이 빚는 ‘문화명주’


공부가주는 대체로 낮은 도수의 배갈로서 1986년 중국 산동성 곡부주창(曲阜酒廠)이 개발, 생산한 술이다. 시장에 나온 후 국내외 중국인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등지로 수출되고 있다. 외국으로 가장 많이 팔려 나가는 배갈의 하나로 손꼽힌다. 1988년 마지막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은장(銀章)을 받았다. 품목에 따라 더러 고가의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대개의 공부가주는 100위안(약 1만7000원) 안팎의 중저가다. 공자의 고향에서, 공자의 후손들이 직접 만드는 술이라는 소문에 의해 우리에게 더욱 친근감을 주는 술이 곧 공부가주인 것이다.

취푸(曲阜)는 위대한 사상가 공자의 고향이다. 현재의 ‘공부가주업회사’의 전신이 되는 것이 바로 공부(孔府, 공자 집안)의 개인 양조장이다. 이 양조장은 2000년이 넘는 양조 역사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 만들어진 술은 역대의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직계 장손들) 중에서 큰 벼슬을 얻은 이들의 전용주가 되었다. 공부가주의 주 제품은 도덕인가(道德人家), 인의(仁義), 성세(盛世), 경전(經典), 수정(水晶), 대도(大陶) 등 6개 계열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 술은 3향(聞香-마시기 전의 향, 入口香-입 안에서 느끼는 향, 回味香-마신 뒤 입안에 남는 향)과 3정(香正, 味正, 酒正)을 모두 갖추었다는 평을 듣는다. 여기에 예스럽고 단아한 포장이 있어서 중후한 유교문화의 향취가 곁들여진다. 

공부가주 회사가 정성으로 만든 최고급품인 공부가 진장주(珍藏酒)는 중국 배갈의 청(淸), 농(濃), 장(醬), 지마(芝麻) 등 네 가지 향을 다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중국 배갈의 정수를 체현했다고 일컬어진다. 이는 곧 중국의 전통철학인 ‘중용과 조화’의 이념에도 부합되는 술이라고도 한다.

공부가주는 무색투명하며 발효 구덩이에서 배어든 향이 짙다. 부드럽고도 감칠맛이 나며 여운의 맛이 길고 오래 끈다. 이 술의 주요 재료는 수수이며 고온에서 띄운 보리누룩을 당화발효제로 쓴다. 그리고 유서 깊은 용두천(龍頭泉)의 물을 끌어와 쓰며 전통의 농향형 제조기술을 채용해 술을 빚는다. 오래된 땅 구덩이에서 발효시키며 모든 원료는 저온 상태로 발효지에 넣는다. 

취푸의 양조 역사는 유구하여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술 제품이 있었다. 그러나 공부(孔府)에서 본격적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부터다. 처음에 이 술들은 모두 공자의 제사에 사용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공부로 찾아오는 고관대작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접대용 술로 바뀌어 갔다.

청대의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앞뒤 8차례나 곡부(曲阜)에 와서 공자의 제사를 지냈다. 그가 최후로 왔을 때(1790년), 제사를 모시는 길에 자신의 딸 우씨(于氏, 72대 연성공 선배<培>의 처)를 보고 싶어 공부에 들렀다. 황제가 초대한 연회석상에 공선배가 공부의 술을 가지고 와 자신의 장인을 대접했다. 건륭이 이를 마셔보곤 거푸 그 술의 뛰어남을 칭찬했다. 술맛에 미련을 못 버린 황제가 그 자리에서 사위인 공선배에게 말했다. “내가 도성으로 돌아갈 때 술 단지 몇 개만 실어다오.” 이후부터 공부에서 매년 황궁으로 보내던 공물은 일체 면제되었음은 물론이다.

당대(唐代)에 이백과 두보가 산동 여행을 마치고 노군(지금의 곡부)에서 헤어질 때 이백이 두보에게 준 시에서도 술 얘기는 빠지지 않는다. “시든 민망초가 바람에 날리듯 우리도 헤어져 다시 만나기 어려울 테니 우선 손에 쥔 술잔이나 비우도록 하세(飛蓬各自遠,且盡手中杯)”라고 한 시구가 그 예다. 

청대에 오면 소주 제조가 성행하였다. 곡부현지(曲阜縣誌)에는 광서(光緖) 26년(1900년)부터 주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3년 건립된 홍순원소과(洪順源燒鍋-소과는 양조장이다),1926년 세워진 의화순소과(義和順燒鍋) 등이 특히 유명한 양조장이었는데 1934년에는 벌써 양조장이 아홉 집으로 늘어났다. 1958년 반씨(潘氏)의 양조장을 기초로 해 곡부주창이 세워졌다.

2001년 ‘중국 10대 문화명주’의 칭호를 얻었으며 2003년, 2004년 2년 연속으로 ‘중국 배갈 100대 기업’에 들었다. 2004년에는 ‘중국 소비자가 만족하는 10대 브랜드’가 되었으며 2006년에는 ‘2006년 산동 10대 명주’의 칭호를 얻었다.

- 구이린 지역의 샹산 일대 풍경(위 사진)과 삼화주의 샹산 저장고.
- 구이린 지역의 샹산 일대 풍경(위 사진)과 삼화주의 샹산 저장고.

● 삼 화 주

‘계림의 마오타이주’란 별칭 가져

풍광 자체가 한 폭의 산수화 같은 구이린(桂林), 이곳에도 우리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그림 같은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던 국내외 관광객들이 저녁 무렵 즐겨 찾는 배갈이 바로 ‘계림 삼화주(三花酒)’다. 삼화주는 현지인들이 일컫는 ‘계림 삼보(三寶)’의 첫머리에 들며 계림부유(桂林腐乳), 계림자숙장(桂林辣椒醬)이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은 구이린의 특산품으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꼭 사 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삼화주는 중국 배갈 중에서도 미향형(米香型) 소곡주(小曲酒)를 대표하는 술로 그 옛날에는 ‘서로(瑞露, 상서로운 이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세간에는 “물은 술의 피요, 쌀은 술의 살이요, 누룩은 술의 뼈”라는 말이 있다. 구이린 사람들은 삼화주의 독특한 풍미를 자랑할 때마다 ‘피와 살 그리고 뼈’를 더 많이 언급한다. 좋은 술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물을 만나야 하는데 아름다운 리강(구이린의 강)의 바닥에서 용출하는 샘물이 바로 삼화주의 피가 된다. 샹비산(象鼻山) 앞 강바닥 깊은 샘에서 솟구치는 샘물은 순하고 달며 전혀 이물질에 오염되지 않았다. 미량의 광물질까지 포함하고 있어 삼화주에 우수한 피를 공급한다. 다음으로 리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쌀은 그 입자가 클 뿐 아니라 전분의 함량이 72%에 달해 이상적인 주중지육(酒中之肉)이 된다. 또 구이린의 교외에서 나는 곡향주약초(曲香酒藥草, 여뀌의 일종)로 만든 누룩은 그 향이 짙어 삼화주 특유의 주중지골(酒中之骨)이 된다.

삼화주의 우수한 점은 순수한 강물, 질 좋은 쌀, 정선된 누룩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써늘한 구이린의 바위 동굴, 즉 삼화주만의 독특한 숙성 저장고 또한 좋은 술을 빚는 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동굴에 들어간 술은 그 맛과 향이 한층 짙어진다. 일반적으로 삼화주는 도자 항아리에 담겨 석산 동굴 안에 들어가며 1~2년이 지나 술맛이 짙은 뒤에야 다시 밖으로 나온다. 

구이린을 찾는 이들은 누구든 손쉽게 삼화주의 역사, 양조 과정 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샹산(象山) 기슭에 위치한 계림 삼화주 문화박물관 덕분인데 회사는 샹산에 술을 저장할 때부터 이 저장 동굴과 박물관을 하나의 벨트로 묶었다. 관광에 술 문화를 접목시키기 위한 의도였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삼화주의 양조 역사는 남송(南宋)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애당초 관청의 하나인 사사공주(師司公廚)에서 만들어지던 술은 머잖아 민간으로 이전됐다. 청말(淸末)부터 전문적인 양조장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은 신 중국 수립 때까지 계림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1949년 이후 중국 정부는 산재하고 있던 민간 주방의 우수한 양조사들을 불러 모아 1952년 계림양조창을 건립했다. 뒤에 계림음료창으로 고쳤으며 1987년 계림양주총창으로 바꾸었다.

삼화주라는 이름은 청대(淸代)에 얻었지만 왜 ‘삼화’인지에 대해서는 통일된 의견이 없다. 한 가지 주장은, 술을 만들 때 원료를 찌고 끓이는 과정을 세 차례 거치는데 주액이 요동을 치는 그때마다 무수한 거품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속칭 세 번 끓이면서 꽃 무더기를 만든다는 ‘삼오퇴화주(三熬堆花酒)’인데 그 줄임말이 삼화주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술병을 흔들면 계림 삼화주만이 술의 액면(液面)에 빛나는 구슬 같은 주화(酒花)가 일어나는데 이 술꽃은 술을 단지에 담을 때, 그리고 병에 넣을 때, 잔에 부을 때 무더기로 피어난다고 해서 삼화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화주는 무색투명하며 청아한 꿀 향기가 난다. 흔히들 입에 넣으면 부드러우며 목을 넘기면 상쾌하고 되돌아오는 맛이 즐겁다고 한다. 술을 다 마신 후에도 입안에 향기가 남는다. 적당히 마시면 정신을 북돋우고 피 돌기를 좋게 해 건강에 좋다고도 한다. 

삼화주는 음용 외에 약용으로도 쓰이며 또 음식요리에도 사용되기 때문에 그 판로는 큰 편이다. 예전에는 작은 규모로 술을 만들어 부자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계림의 민가에 전해지는 말 가운데 “부자가 되고 싶으면 소주를 빚고 두부를 만들어라”라는 것이 있다. 근대에 와서 중국이 외세와 싸우던 기간, 계림의 인구는 오히려 늘어났고 소비 수준도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았다. 특히 1941년 홍콩 함락 이후 외국 술의 수입이 대폭 줄어들면서 주정을 공급받는 일이 아주 곤란해졌다. 이때 각지의 산업체에서는 삼화주로서 주정을 대신했는데 이로써 계림의 양조업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무렵 40여 집에 불과하던 양조장이 100여 집으로 늘어났으며 특히 이만가(泥灣街, 지금의 해방교 동쪽 강가 지역) 일대에는 안태원(安泰源), 주장흥(朱長興), 라영정(羅永貞) 등 6~7집이 집결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안태원의 삼화주가 가장 유명했다.

1957년 전국 소곡주(쌀을 원료로 하고 곰팡이 균을 접종한 누룩으로 만든 배갈) 평가대회에서 계림 삼화주가 일등을 차지했으며 1963년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은장(銀章)을 받으면서 ‘국가 우수 품질주’로 뽑혔다. 1979년 제3차 전국평가대회에서 다시 우수 품질주로 선정되면서 삼화주는 중국 배갈의 4대 향형(香型)의 하나인 미향형(米香型) 배갈의 대표가 되었다. 이로써 삼화주 회사는 일찌감치 중국 100대 배갈 회사의 앞줄에 앉을 수 있었다. 

공부가주처럼 비록 ‘국가 명주’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삼화주는 ‘계림의 마오타이주’란 별칭을 달면서 중국 전역, 그리고 일본, 동남아 등지로 팔려나가고 있다.

- 계림 삼화주
- 계림 삼화주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