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카페베네 등이 진출하면서 국내에서와 같은 ‘골목상권’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미국에 카페베네 등이 진출하면서 국내에서와 같은 ‘골목상권’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발관’, ‘서점’, ‘순대’ 등 양옆으로 한글 간판이 늘어선 4차선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자 수백m 간격으로 뚜레쥬르와 파리바게뜨, 카페베네가 차례로 나타났다. 가게 내부는 한국인으로 만원(滿員).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동네 빵집은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 브로드애브뉴다.

뚜레쥬르와 파리바게뜨는 2004년과 2005년 각각 ‘미국인 공략’, ‘국내 제빵 기술의 우수성 전파’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미국에 진출했다. 그러나 8년여가 흐른 지금, 미국에서 각각 20여개의 점포를 자랑하는 이 두 브랜드를 만나려면, 도심이 아닌 한인(韓人) 상권 밀집 지역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두 회사와 영세 한인 빵집 주인들이 국내에서와 똑같은 ‘골목상권’ 논란을 벌이고 있다. 미국인들은 두 회사 제품을 “맛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매장을 찾아가기는 꺼린다. 왜일까.

지난 4월4일 오후 5시쯤 뉴욕시 퀸스 플러싱 노던대로의 한인 제과점 ‘팬트리’에는 딱 한 테이블만 손님이 있었다. 20대 중국인들이었다.

“2012년 10월25일이었어요. 날짜도 잊지 못하죠.” 가게 주인 최철환씨(54)가 말했다. 100m 남짓한 곳에 파리바게뜨가 들어선 날이다. 최씨는 “지금까진 연 매출이 70만달러 정도 됐지만, 그날 이후 지금까지의 추세라면 올해는 30만~40만달러 사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6년 가족과 함께 이민 온 최씨는 30년간 보험영업, 자동차 외판 등 월급 생활로 모은 돈 38만달러를 털어 2007년 이 가게를 냈다. 그는 “2명이던 점원을 1명으로 줄여도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게를 접어야 할 것 같다”며 “막내딸 대학 졸업시켜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최씨 가게의 유일한 손님이던 중국인 청년들에게 “왜 파리바게뜨를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회사원 유쿤나(龍昆娜·28)씨가 “한국인들에겐 파리바게뜨가 자국의 유명 브랜드라는 점이 중요하겠지만, 나는 여기 빵이 더 부드러워서 좋다”고 답했다. 최씨가 힘없이 웃으며 “그럼 뭐하냐. 이 동네는 손님 90%가 한국인인데…”라고 했다. 이들이 나가자 가게는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시각 맞은 편 파리바게뜨는 퇴근길 손님 20여명으로 붐볐다. 백인 손님 2명 외에 나머지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지난 4월2일 오후 2시55분 팰리세이즈파크 카페베네는 평일 낮 시간대임에도 손님으로 붐볐다. 15명 정도 되는 손님 전원이 육안상 한국인으로 보였다. 인근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도 상황은 비슷했다.

바로 그 시각, 이들 사이에 자리 잡은 한인 빵집 ‘파리지엔느’는 테이블 10개가 모두 비어 있었다. 가게 지배인은 “지난해 말 양옆으로 뚜레쥬르와 카페베네가 문을 열면서 하루 매출이 1500달러에서 1200달러로 떨어졌다. 그나마 이웃 상인들과 함께 시 정부에 민원을 내 두 가게의 테이블 수를 제한해놓은 게 이 정도”라고 말했다.

미국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 있는 카페베네 매장. 대다수 손님이 한국인이다.
미국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 있는 카페베네 매장. 대다수 손님이 한국인이다.

미국인 빵집은 한국 제빵 체인에 포위돼도 ‘이상 무’
국내 양대 베이커리 브랜드인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는 미국에 각각 26개와 21개의 매장을 낸 것으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파리바게뜨의 경우 매장 26개 중 25개가 캘리포니아·뉴저지·뉴욕 등 재미교포가 많이 사는 단 3개 주에 집중돼 있다. 지난 4월2~5일 방문과 전화 취재, 구글 지도서비스 검색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이들 모두 한인 상가 밀집 지역 또는 적어도 한국계 대형마트나 한국계 은행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머지 펜실베이니아주의 1개 매장 역시 미국 최대의 한인 대형마트인 ‘H마트’ 바로 옆이었다. 미국에서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셈이다.

미국에서 현지 상인과 가맹점 계약을 맺는 형태로 매장을 넓혀가는 뚜레쥬르 역시 매사추세츠·텍사스·조지아 등 3개 주에 7개 매장을, 14개 매장은 캘리포니아·뉴저지·뉴욕에 냈는데, 21개 매장 대부분이 한인 상권에 있었다. 뉴욕시 타임스스퀘어에 상징적인 1호점을 내면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벌였던 카페베네 역시 이후 개점한 4개의 점포는 모두 한인 상권에 냈다.

반면 미국 사모펀드가 투자한 한국산 요거트 전문점 ‘레드망고’의 경우, 워싱턴DC·시카고·보스턴 등 미국 주요도시 대부분에 매장을 갖고 있다.

재미교포 상인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대기업이면 대기업답게 주요 상업 지역에서 미국 대형 체인점과 맞붙어야지 왜 코리아타운에서 쉽게 돈을 벌려고만 하느냐는 것이다. 퀸즈한인회 류제봉 회장은 “한국 프랜차이즈 업체가 국내에서는 ‘글로벌 경쟁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재미교포들이 수십년간 닦아놓은 한인 상권만 거저 가져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4월16일 뉴욕에서 열린 한국 프랜차이즈 설명회장 앞에서 한인 상인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한국 베이커리들이 한인 상권만 골라서 영업하는 이유는 뭘까. 지난 4월2일 오후 파리바게뜨·뚜레쥬르·카페베네에 포위당한 뉴저지 한인상권의 현지인 제과점 ‘펠리세이즈파크 베이커리’. 실내로 들어서자 10년은 묵었음직한,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는 냉장고와 낡은 진열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가게에는 지역에 사는 백인 손님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흑인 점원 셰릴(Sheryl)은 “양쪽에 한국 대형 빵집이 들어섰지만, 우리 가게는 매출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모든 빵을 손으로 만들고, 가격도 도넛이 70센트 정도로 한국 빵집의 절반”이라고 말했다. 이 빵집을 찾은 데비(Debby·46)씨는 “추수감사절이나 주요 명절에 이 집 호두파이를 사먹는 건 우리 집안 전통”이라며 해당 가게를 “진짜 빵집(Real Bakery)”이라고 추켜세웠다.

미국 최대의 맛집 평가 사이트 ‘옐프’(Yelp)에는 한국 베이커리 ‘빅2’ 중 한 곳에 대해 “간판은 프랑스를 연상케 하지만, 빵 맛은 프랑스식이 아니다. 점원은 한국어를 쓴다”는 소비자 평가 글이 올라와 있었다.

미국 뉴욕 퀸즈 노던대로에 있는 파리바게뜨 매장
미국 뉴욕 퀸즈 노던대로에 있는 파리바게뜨 매장

“포지셔닝 실패…샌드위치 메뉴 강화해야”
그럼에도 미국인들이 평가하는 두 브랜드의 빵 맛은 나쁘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로부터 두 회사의 빵을 시식한 현지인 6명은 모두 “맛있다”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도 두 회사가 현지인에게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애틀랜타 지역의 한인 베이커리 체인 ‘화이트윈드밀’의 김일환 사장은 그 원인을 ‘품질 부족’이 아닌 ‘현지 소비자 파악 부족’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 소비자는 한 번에 여러 종류의 빵을 사가 집에다 재어놓고 먹지만, 미국 소비자는 당장 먹을 것 한두 개 잡으면 끝이다. 대신 한 끼 식사가 되는 샌드위치 선호도가 높은데 한국 대기업은 샌드위치에 주력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샌드위치 메뉴를 집중적으로 개발한 화이트윈드밀은 캘리포니아 등에 비해 한인 손님 비중이 적은 애틀랜타 북동부 일대에 분점 5개가 있고, 뚜레쥬르의 진출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이크 기조(Gizzo·28)씨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한국 빵은 끼니라기보다는 커피에 곁들여 먹는 간식에 가까운데, 커피를 마시러 한국 빵집에 가기에는 미국에 맛있는 커피 전문점이 무척 많다”고 말했다.

뉴욕 패션기술대학(FIT)의 박진배 교수는 “두 회사가 확실한 시장 파악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미국에 진출했다가, 초기에 한인 상권에서 장사가 좀 되니까 아예 험난한 주류(主流) 시장 도전은 포기하고 그냥 변방에서 안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