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켄싱턴과 첼시 지역에 있는 부동산 10건 중 1건은 역외 기업 소유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런던의 켄싱턴과 첼시 지역에 있는 부동산 10건 중 1건은 역외 기업 소유인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주요 인사들의 해외 재산 도피와 탈세 정황 등을 담은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가 폭로된 가운데 영국 런던 부동산 시장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뜨거운 화제’가 됐다. 각국의 정상을 비롯해 유력 정치인과 부자들 본인은 물론 그 가족과 친인척, 측근들이 해외에 빼돌린 재산이 영국 부동산에 집중 투자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전 세계의 ‘돈세탁’된 자금들이 런던에 (거대한) 부동산 시장을 형성했다”고 진단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영국 런던의 부동산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원인 중 하나를 찾은 셈이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세계 4위권의 파나마 최대 로펌인 ‘모색 폰세카(Mossack Ponseca)’가 지난 40년 동안 거래한 ‘해외 고객’들의 각종 돈의 흐름과 투자, 주식 거래, 재산 이동 등이 담긴 자료다. 분량이 1150만건에 달한다. 등장 ‘고객’은 전 세계 200여개국 주요 인사 1만4000여명이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 21만여곳을 설립한 사람들이다. 자료는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자이퉁에 입수된 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넘겨져 세계 78개국 107개 언론사가 공동 분석했다.


런던 부동산, 전 세계 ‘비밀 자금’에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

현재 영국 부동산 중 해외에 있는 주인이 보유한 물량은 무려 1700억파운드(약 278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이 런던에 집중 투자된 상태라고 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토지등기소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해외 회사들이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에 가진 부동산은 10만여건”이라고 했다. 부동산 구매자가 역외 회사를 이용해 외국 부동산을 사들이는 이유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숨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영국 런던의 켄싱턴과 첼시 지역에 있는 부동산 10건 중 거의 1건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처럼 조세회피처에 설립된 역외 기업 소유”라고 말했다.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폭로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즉, 각국 유력 인사들이 해외로 빼돌린 재산으로 런던 부동산을 사들였다는 정황들이 사실임을 보여줬다. 영국 부동산을 매입한 역외 기업은 모두 3만1000여개로 이 중 2800여개가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매입한 부동산은 2014년 이후에만 6000여건, 금액으로는 70억파운드(약 11조5000억원)였다.

영국 부동산의 ‘큰손’ 투자가 중 넘버원은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대통령으로 밝혀졌다. 런던 중심가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있는 BHS 건물을 비롯, 브루턴 스트리트에 있는 디자이너 아웃렛 등 런던 시내 금싸라기 땅에 건물, 상가, 백화점 등 부동산 수십건을 보유했다. 하이드파크 인근에 있는 한 구역의 상가들은 가격이 1억6000만파운드(약 2600억원)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UAE 대통령이 모색 폰세카를 통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가 구입한 런던 부동산은 12억파운드(약 2조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야드 알라위 전 이라크 총리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한 회사를 통해 두 채의 부동산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8년에 275만파운드짜리 켄싱턴 타운 하우스를 구입했고, 1년 후에는 하이드파크 인근 에지웨어 로드에 있는 75만파운드짜리 상가 건물을 사들였다.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의 출가한 딸 마리암 사프다르는 2곳의 역외 기업을 설립했는데 그 기업들은 런던 시내에 각각 한 채씩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가디언은 “해외 기업들의 영국 부동산 매입 자체는 물론 합법”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들이 투자 개념으로 부동산을 사들이는 바람에 영국 부동산이 더 크게 오른 것은 분명하다”고 해석했다.


‘부패한 돈’ ‘독재자 돈’ ‘폭력배 돈’

검은돈도 숨어들었다

런던의 부동산에는 각종 검은돈도 속속 몰려들었다.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측근인 소울리만 마로프는 2012년부터 2년 동안 유럽 내 자산이 동결됐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런던 시내에 600만파운드(약 100억원)어치의 고급 아파트들을 소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미 사망한 시리아 정보 수장의 가족도 120만파운드짜리 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대판 파라오’라고 불렸던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아들 알라 무바라크는 버킹엄 궁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800만파운드(약 130억원)짜리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부패 혐의로 구속돼 징역형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국 나이지리아에서 범죄 혐의로 기소를 앞두고 있는 부콜라 사라키 상원의장 역시 버킹엄 궁전 인근에 부동산을 갖고 있고 그의 부인도 또 다른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국가범죄수사국(NCA) 관계자는 “범죄, 부패 자금들에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목적지”라면서 “매년 수조원대의 검은돈이 이곳에서 돈세탁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불황을 모르는 영국 부동산

해외 뭉칫돈이 뒷받침한 런던 부동산의 ‘폭발적인’ 가격 상승은 영국 정부 당국의 고민거리가 됐다. 전 세계가 불황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영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탄탄한 성장을 기록했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했지만 가격 상승 속도와 폭이 ‘비정상적’인 수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버블’에 대한 우려도 컸다.

주택, 상가 가격 상승이 멈출 줄을 모르자 일반인들도 은행에서 대출받아 ‘임대용’ 부동산을 구입하는 과열 현상이 벌어졌다.

임대사업용 부동산 매입자는 특히 금리가 약간만 올라도 금리를 상환하지 못하거나 집을 팔겠다는 의사가 강한 층이어서 약간의 충격으로도 부동산 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요인으로 분석됐다.

영국 정부는 올 4월부터 임대주택용 모기지 대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임대용 주택에 대해 인지세를 추가해 주택 구입 가격의 3%를 더 부과하기로 했다. 집값에 따라 지금보다 2~10배 세부담이 커졌다. 또 내년 4월부터는 이자비용에 대한 소득공제를 4년 동안 단계적으로 축소할 계획이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택에 대한 수요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장일현
서울대 경제학과, 행정대학원 석사, 조선일보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기자, 현 조선일보 유럽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