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있는 테라노스 본사 전경. <사진 : 기업평가회사 글래스도어>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있는 테라노스 본사 전경. <사진 : 기업평가회사 글래스도어>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가들은 물론 미국민 전체를 충격에 휩싸이게 한 사건이 최근 일어났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미국판 황우석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촉망받던 ‘국가적 영웅(national hero)’이 급격히 몰락했다. 지난달 18일 블룸버그통신은 혈액진단 스타트업(초기 벤처)인 ‘테라노스(Theranos)’가 기술과 운영 면에서 투자자를 속였는지에 대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테라노스는 이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도 받고 있다면서 SEC의 서류 제출 요청에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5년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벤처기업으로 뽑혔던 테라노스는 하루아침에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할 ‘사기극’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테라노스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을 짊어지고 나가는 대형 벤처들의 뒤를 이을 기업으로 각광받았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적 요소도 완벽하게 갖췄다. 2003년 명문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미모의 여대생 엘리자베스 홈스는 학교를 중퇴하고 창업에 나섰다. 그녀는 비밀리에 연구개발을 한 끝에 알약 크기의 채혈 용기를 이용해 손가락에서 피 몇 방울만 뽑아내면 암(癌)을 비롯한 70여가지 질병을 단번에 진단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실험용 피를 채혈하는 방식이 주사기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알약만한 채혈 키트이며 환자의 피를 몇병씩 뽑지 않고도 기존 혈액검사 비용의 10분의 1 값에 더 정밀한 검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홈스는 긴 주삿바늘을 무서워했던 어릴 적 기억 때문에 바늘 없이 피를 뽑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홈스가 대학을 자퇴하고 기업을 세운 건 MS의 빌 게이츠나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비슷했다. 잡스를 존경한 홈스는 잡스처럼 터틀넥만 입고 다녔다. 19세 대학 중퇴생이 세운 벤처는 10년 후인 2014년 투자를 유치했을 때 무려 90억달러(약 10조3000억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는 ‘유니콘’이 됐고, 홈스는 자산 평가액 45억달러로 포브스의 자수성가형 여성 억만장자 리스트 1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 홈스 테라노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 <사진 : 블룸버그>
엘리자베스 홈스 테라노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 <사진 : 블룸버그>

잡스 따라하던 미모의 창업가

그러나 이런 스토리텔링은 모래성으로 쌓아올린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테라노스가 고객에게 제공한 200개 넘는 테스트 결과의 대부분이 다른 회사로부터 산 기존 기계로 검사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이 회사의 전직 직원들이 테라노스가 개발한 장비로 실시한 일부 테스트의 정확성에 의문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후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지만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지 못하던 테라노스의 의혹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지난해 말 미국 식품의약청은 테라노스가 미승인 ‘나노테이너(혈액검사기구)’를 사용한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올해 1월엔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연방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서비스센터가 테라노스의 캘리포니아 시설이 환자의 건강과 안전에 즉각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3월 말엔 뉴욕 마운트 시나이병원의 아이칸 의대팀이 테라노스의 혈액검사 결과가 다른 업체와 비교할 때 160%가량 더 ‘비정상적(abnormal)’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고 이 분석결과가 유력 학술지인 임상연구저널(The Journal of Clinical Investigation)에 실렸다. 테라노스는 이에 대해 “아이칸 의대팀의 연구 결과가 결함이 있고 부정확하다”며 “임상연구저널이 이러한 결과를 실은 것은 실망스럽다”고 반박했지만 이미 테라노스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 돌아선 후였다.

이어 당국의 본격적인 제재가 시작됐다. 미국 연방 보건당국인 CMS가 3월 18일 테라노스에 서한을 보내 연구소 면허 취소 및 최고경영자(CEO) 경영 중단 등의 방침을 통보했다. CMS는 테라노스가 캘리포니아에서 운영하는 연구소의 면허를 회수하는 한편, CEO인 엘리자베스 홈스와 회장인 서니 발와니를 최소 2년 동안 캘리포니아 및 애리조나에 있는 테라노스 연구소의 소유·경영에서 손을 떼게 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테라노스가 이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해 CMS가 재심 중이지만 결과가 뒤집어질 가능성은 낮다. 테라노스는 CMS가 재결정을 내리더라도 행정법원 제소 등으로 시간을 더 끌 수는 있겠지만 혐의를 완전히 벗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게다가 검찰 수사라는 뇌관까지 터질 수 있는 상황이다.


벤처투자가·미디어도 당해

미국 바이오 업계와 벤처 투자업계는 테라노스가 남긴 교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8200여개 체인점을 갖고 있는 미국 최대 약국 체인인 월그린의 ‘초보적 실수’다. 신사업 영역에 신속하게 진출하지 못하면 ‘낡은 약국’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던 월그린은 2013년 9월 테라노스와 협력계약을 맺고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20개의 월그린 체인점에 테라노스의 혈액검사 키트로 검사할 수 있는 테라노스 건강센터를 열었다. 이후 전국 월그린 체인점에 테라노스 센터를 열어 모든 미국인이 1.6㎞ 이내에서 손쉽게 혈액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이오 기술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이 ‘바이오 사기극’을 도운 약국 체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됐다.

벤처캐피털들도 테라노스에 대한 투자는 전혀 실리콘밸리답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테라노스에 처음 100만달러를 투자한 벤처 투자가는 홈스의 어릴 적 이웃이었다. 바이오 관련 석·박사들이 포진해 바이오 기업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투자회사는 거의 한 곳도 테라노스에 투자하지 않았다. 홈스에 열광한 것은 제대로 된 벤처캐피털이 아니라 표지 인터뷰로 홈스를 다룬 포브스, 화려한 인터뷰를 실은 뉴욕타임스 주말매거진 ‘T’ 같은 미디어였다. 설익은 벤처투자가들은 이 미디어에 담긴 ‘허상’을 좇았다. 테라노스의 이사진에 기술과 경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같은 정치권의 거물 원로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이제서야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테라노스의 부활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기술에 당장은 허점이 있다고 해도 수많은 특허가 결국 힘을 발휘할 것이며 기존 검사보다 훨씬 싼값에 혈액검사를 하면서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또 다른 사업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기술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지만 아직 테라노스의 ‘스토리’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