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과 관련, 시진핑 총서기(왼쪽)와 리커창 부총리의 대외정책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 시진핑 총서기(왼쪽)와 리커창 부총리의 대외정책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2월12일 이루어진 북한의 3차 핵실험은 중국의 대외정책과 앞으로의 중국 경제발전에도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다. 1978년 12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의 길로 들어선 이래 중국을 보는 시각이 1990년대의 ‘중국붕괴론’에서 2000년대의 ‘중국위협론’으로, 다시 최근 들어서는 미국과 유럽에 일반화된 ‘중국책임론’의 앞날을 바꾸어놓을지도 모를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국제정치적으로는 1840년부터 두 차례 치러진 아편전쟁의 결과 청(淸)왕조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외교적 책임을 다하지 않던 고립된 나라에서 ‘베스트팔렌’ 체제를 받아들여 외국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 편입된 이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랬다가 다시 고립의 길을 선택한 마오쩌둥(毛澤東) 시기의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해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과거 패권을 추구하던 이미지를 회복했으며,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처리 여부에 따라 중국의 외교정책이 국제사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국이 북한의 핵실험을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교묘하게 북한을 통한 미국 견제와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줄 경우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 북한의 핵무장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에 대부분의 원유와 식량을 공급하는 중국 이외에는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직 중국 경제의 크기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르지 못하는 형편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다시 중화패권주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줄 경우, 미국과 유럽이 ‘중국책임론’을 거론하면서 중국에 대한 견제에 나설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아편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1820년대의 청 왕조는 인구로는 전 세계 인구의 36%, GDP로는 전 세계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GDP가 전 세계 GDP의 50%에 육박하며 중국을 압도하고 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다음 날인 지난 2월13일 중국 공안이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 주변을 경비하고 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다음 날인 지난 2월13일 중국 공안이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 주변을 경비하고 있다.

아편전쟁이 시작되기 이전 중국의 청 왕조는 베이징(北京)에 모여든 전 세계의 외교관들이 황제를 알현하려면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三九叩)’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했다. 그러던 청 왕조가 아편전쟁이 끝난 이후 1876년에 가서 삼궤구고를 폐지하고 간단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국궁(鞠躬)의 예만 갖추면 외국사신들이 황제를 만날 수 있게 하고,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도 상주 공사(公使)를 파견하는 등으로 이른바 유럽에서 먼저 형성된 국제정치 체제인 베스트팔렌 체제를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나 중국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이후 동서냉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시 미국, 유럽과의 교류를 끊고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만 교류하는 폐쇄적 행태를 보여줬다. 그런 중국을 다시 미국, 유럽과 교류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주도한 미·중 데탕트였다. 지난 1978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이 1979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미국을 방문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민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는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편 결과 중국과 미국, 유럽의 경제교류가 본격화되고 중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가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빠른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당총서기와 리커창(李克强) 총리 내정자가 끌고 가게 될 중국의 외교는 덩샤오핑이 문을 연 개혁·개방 시대 이후 그동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과 이웃 나라들 사이에서는 패권을 추구하는 지연(地緣)외교의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장쩌민(江澤民)시대에 중국 외교는 빠른 경제발전에 한국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 1992년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과 수교를 체결하고, 1999년 미 공군기가 유고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공격한 사건과, 2001년 미 공군 정찰기가 중국 남부 하이난다오(海南島)에 불시착한 사건에도 빠른 경제발전의 지속을 위해 “아직은 미국과 충돌할 때가 아니다”라면서 장쩌민이 반미 시위를 가라앉히는 자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가 당총서기로 취임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좌적(左的)인 경향을 나타내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거의 마오쩌둥 시대로 복구하고, 덩샤오핑의 ‘화평발전(Peaceful Development)’ 대신에 특히 북한 핵문제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을 놓고 북한을 두둔하면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외교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왼쪽)은 북한의 반대에도 한국과 수교를 체결했으나 후진타오 총서기(오른쪽)는 미국과 대립하면서 북한을 두둔하는 정책을 펼쳤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왼쪽)은 북한의 반대에도 한국과 수교를 체결했으나 후진타오 총서기(오른쪽)는 미국과 대립하면서 북한을 두둔하는 정책을 펼쳤다.

우리 정부, 북한 견제 위한 적극적인 대중외교 펼쳐야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탑재가 가능할 정도로 핵무기를 소형화하고, 공개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하는 선언을 하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이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밝히는 등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중국책임론과 관련, 중국에게도 영향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중국대로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핵실험이 중국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사전 조정된 발표를 하는 등으로, 교묘하게 북한을 앞세워 미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모습은 시점이 시진핑 시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8년 시작된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은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들인 닉슨과 키신저의 의도에 따라 중국이 자유주의적 국제정치 체제에 편입되기를 기대하는 뜻에서 미국과 유럽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국과 활발한 경제교류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핵무기 확산 금지’라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인식에 도전하는 북한의 행동 제어에 나서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을 경우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의 8%에 불과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이 언제든 중국에 대한 견제에 나설 가능성이 큰 현실이라는 점을 시진핑 지도부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중국책임론과 관련,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은 지난 35년 동안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을 이끈 동력이 프랑스 유학파였던 덩샤오핑과 모스크바 유학을 경험한 장쩌민이 개방적인 외교를 이끈 데서 나왔으나, 순수 국내파인 후진타오 시대에 폐쇄국가인 북한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미국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당총서기로 취임한 시진핑이나 3월5일 개막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총리 임기를 시작하는 리커창 두 사람 역시 외국 유학을 경험하지 않은 순수 국내파라는 점에서 중국의 대외정책 방향이 어떻게 결정될지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전인대에서 발표될 내각을 중심으로 구성될 당중앙외사영도소조의 구성원들 면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리 파악하고 북한 견제를 위한 적극적인 대중(對中) 외교를 펼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