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JAL을 맡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1997년 그는 부와 명예보다 선행을 원한다며 갑작스레 출가를 감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3년 전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JAL을 맡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1997년 그는 부와 명예보다 선행을 원한다며 갑작스레 출가를 감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답다. 역시 명성은 손쉽게 얻어지는 게 아님이 다시금 확인됐다.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81) 교세라 명예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가 빈사상태의 JAL(일본항공)을 3년 만에 부활시킨 후 최근 약속대로 경영일선에서 물러섰다. 3년 전 “보수는 안 받고 3년만 일할 것”이라고 했던 약속을 실천한 것이다. JAL은 화려한 명성의 구원투수가 등판한 이후 몰라보게 달라졌다. 뼈를 깎는 체질개선으로 1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2년째에는 법정관리에서도 벗어났다. 3년차 땐 재상장까지 성공했다. 그는 최고경영자(CEO)의 역할과 의미가 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존경받는 경영자의 모든 걸 증명해줬다. 일찍이 ‘경영의 신’이란 수식어가 붙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살아있는 경영신화의 주인공은 이제 본업인 교세라(京セラ)의 경영에 전념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2월 서울에서 열린 하나금융그룹 드림소사이어티에서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이 강연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서울에서 열린 하나금융그룹 드림소사이어티에서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이 강연하고 있다.

창고에서 시작한 교토세라믹 세계시장 점유율 1위 달성
교세라는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이 1959년 설립한 회사다.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제조업체로 명성이 높다. 종신고용·연공서열 등 직원중시의 일본적 경영시스템을 고수하는 교토기업의 맏형 격이다. 그간의 성장세는 놀라운 상승곡선의 연속이었다. 남의 회사 창고를 빌려 시작한 ‘교토세라믹’은 현재 주력제품(세라믹) 시장점유율 1위로 세계시장의 절반을 차지한다. 사업다각화로 새롭게 진출한 업종에서도 시장장악력이 경이롭다. 자본금 300만엔·매출 2600만엔·종업원 28명이던 평범한 벤처기업이 지금은 세계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막강파워로 성장한 것이다. 2012년 3분기엔 매출액 1조1908억엔에 당기순이익 794억엔을 기록했다.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은 회사보다 더 유명하다. 불확실한 경영환경을 극복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선정된 ‘이나모리즘’은 그의 경영철학을 상징한다. 실제 교세라의 성장에너지는 ‘이나모리즘’으로 정리된다. ‘이나모리즘은 불멸인가(稻盛イズムは不滅か)’ 등의 제목으로 주요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고 있다(<닛케이비즈니스>). 그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혼다 쇼이치로(本田宗一)와 함께 ‘일본경영의 3대 신’으로 추앙받는다. 3명 중 생존자는 그뿐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JAL의 재건계획에 민주당 정권이 그를 삼고초려로 모신 이유다.

경영이념은 꽤 인간적이다. ‘전체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류와 사회의 진보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경영이념이다. ‘이나모리즘’의 핵심가치다. 주력 사업은 파인세라믹과 반도체 등의 부품사업(54%)과 통신 및 정보기기를 취급하는 기기사업(35%)이다. 이 밖에 정보통신서비스 등의 사업도 펼치고 있다. 스마트폰부터 자동차는 물론 태양전지까지 생활주변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기·부품을 취급하는 알짜배기 회사다. 그룹회사는 모두 235개사에 달한다. 고수익 회사답게 꾸준한 매출액 경상이익률을 확보한 덕에 탄탄한 재무구조를 지닌 ‘근육질 회사’로 유명하다. 총자산 2조엔 중 자기자본비율이 74%에 이른다. 윤택한 자금력을 갖춘 것은 사업다각화를 위한 신속한 투자와 기업 인수·합병(M&A)을 염두에 둔 조치다. 

종합정보통신그룹으로도 분류되는 회사의 활동영역은 광범위하다. 주력은 세라믹의 교세라와 정보통신의 KDDI로 양분된다. 전신은 1958년 공업용도자기(파인세라믹)를 생산·판매하는 교토세라믹이다. 경쟁사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성과는 빨랐다. 또 다른 축은 KDDI의 정보통신 부문이다. 다각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1984년 정보통신사업의 자유화에 따라 NTT에 맞서고자 세운 DDI가 본류다. 2000년 DDI를 포함한 4대 민간통신업체를 합병해 랭킹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가 탄생했다.

확고한 경영철학 담긴 ‘이나모리즘’
앞서 언급했듯 교세라의 성공신화는 ‘이나모리즘’으로 요약된다. “나는 철학이 있어 성공했다”는 그의 말처럼 확고한 기업이념과 철학, 그리고 미래를 읽는 능력과 결단력의 총체가 바로 이나모리즘이다. 교세라의 철학에는 일과 사람, 조직, 리더십, 경영, 성공의 본질·의미가 명확하다.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은 “기업의 흥망성쇠는 결국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렸다”며 “이윤을 추구하더라도 바른 길을 걷겠다는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가란 경마장에 나온 말처럼 자신을 믿고 마권(주식)을 산 사람(주주)을 위해 죽어라 달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는 <교세라 철학(Philosophy)>이란 책자로 발간됐다. 교세라 철학이 희박해질 때 회사운명은 끝이라고 본 그는 자신의 이념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그래서 ‘이나모리식 12대 경영항목’을 선정해 교육하고 있다. 이는 기업의 안정과 혁신의 양립을 설명한 ‘팽이이론’으로 요약된다. 구심력과 원심력을 적절히 섞어 시대변화에 대응하자는 논리다. 팽이가 돌자면 원심력(다각화·혁신)이 필요한데 이때 쓰러뜨리려는 외부변수는 구심력(교세라 철학계승)으로 제어하자는 얘기다. 이는 목표와 비전의 명확한 좌표축을 선정한 후 다각화를 통해 ‘선택과 확대’를 추진해왔던 회사의 성장사와 일치한다. 

교세라는 다각화로 성장을 반복했다. M&A의 변칙으로 돈을 벌었다고도 하지만 “도의에 따라 회사를 떠맡았을 뿐 결코 사냥꾼처럼 행동하진 않았다”는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말처럼 무리수는 거의 없었다. 실제 적자기업을 M&A해 흑자로 바꾼 후 자사사업과의 상승효과를 유도했다는 평가가 많다. 또 M&A 후 인원 삭감 없는 고용보장으로 조직원의 역량발휘를 이끌어냈다. 이때 ‘적자는 죄악’, ‘가격결정이 경영’이라는 교세라식 경영방침이 흑자달성에 주효했다. 바로 ‘아메바경영’이다. 이는 교세라 경영철학의 사실상 전부다. 회사의 성공DNA인 이나모리즘을 현실에 적용하는 게 ‘아메바’ 조직이다. ‘아메바경영’은 많은 대학에서 창조형기업의 대표사례로 연구 중이다.

아메바는 단세포동물이다. 암수가 섞이지 않은 채 혼자서 무성생식을 한다. 손오공이 털을 뽑아 한번 불면 수백 마리가 복제되는 것과 같다. 또 연체동물처럼 필요에 따라 분리·합체된다. 기업의 성장(Fat)은 불가피하게 유연성(Flexibility)과 신속성(Fastness)을 저하시킨다. ‘3F의 딜레마’다. 명예회장은 이 열쇠를 아메바에게서 찾았다. 제아무리 거대기업이라도 아메바처럼만 움직인다면 3F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봤다. ‘아메바경영’은 일본이 낳은 가장 유명한 경영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메바경영은 소집단·부문채산제로 정리된다. 말단조직의 신축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개개인의 강력한 열정을 살리고자 조직원 수를 규격화하지 않았다. 아메바조직의 인원수는 3~4명에서 많게는 40~50명에 이른다. 구성원도 자주 교체된다. 조직을 둘러싼 고정·파괴가 일상적이다. 제조업이면 공정별로, 영업은 지역·상품별로 아메바조직이 꾸려진다. 이익관리는 독립채산에 따라 각 아메바의 리더가 챙긴다. 이때 리더는 흑자를 위한 자발적인 수익창출 유인효과에 직면한다. 즉 교세라는 수천 개의 아메바가 합쳐진 조직이다. 아메바조직은 매월 매출·경비를 조사해 채산표를 만든다. 그 차이가 이익이다. 이익을 노동시간으로 나눈 ‘시간당 채산성’이 세포분열의 근거다. 때문에 아메바조직을 ‘Profit Center’라고도 한다.  

조직의 고정관념 깬 ‘아메바 조직’으로 성공
아메바조직은 일·적성·효율·전체효과 중심으로 운영된다. 운영목적은 다양하다. 먼저 전원참가의 경영을 실현한다. 아메바조직은 지혜의 원천을 멤버로 보고 모든 이에게 CEO가 될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또 공헌도는 채산으로만 측정된다. 아메바의 조직목표는 시간당 채산에 근거한 부가가치 창출뿐이다. 아메바끼리는 거래·협력관계인 동시에 라이벌이다. 경쟁유발을 위해 채산을 나타낸 그래프가 작업현장 곳곳에 붙어 있다. 투명경영도 가능하다. 조직을 세분화면 회사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다. 좀 복잡해지면 곧 세포분열이다. 이때 각 아메바의 매출·경비·시간집계는 더 정확하게 파악돼 의사결정은 한결 신속해진다. 교세라 커뮤니케이션이 조화로운 건 이 때문이다.

아메바경영은 몇 가지 조건에서 시너지를 낸다. 가장 중요한 게 기업내부의 신뢰관계다. 아메바조직은 단순한 이익관리법이 아니다. 전원참가 경영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채산만 갖고는 모든 직원의 참가경영이 불가능하다. 아메바는 신뢰가 생명이다. 노력이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신념과 서로가 경영공동체의 멤버라는 인식공유가 필요하다. 경영 수치 역시 중요하다. 경영자의 목표에 대한 진지한 집착과 추구가 없으면 현장에서의 지혜는 솟아나지 않는다. 아메바경영은 경영자가 힘든 제도다. 피드백시스템도 필수다. 신속한 경영수치 전달로 현장의욕을 유지해야 해서다. 또 리더는 탄력적인 분열·통합을 통해 조직을 최적화시킬 필요가 있다.

아메바경영은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제조업 외에 유통·서비스업체 등에 벤치마킹돼 급속도로 확산 중이다. 현재 아메바경영을 도입한 회사는 300개가 넘는다. 굵직한 회사도 많다. 이나모리즘을 설파하는 교육기관인 ‘세이와주쿠(盛和塾)’의 회원만 8031명(2012년 10월)이다. 아메바경영의 습득이 만족스런 결과로 이어진다는 증거다. 다만 교세라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실적이 최초로 흔들렸다. ‘반복 성장하는 창조적 기업’이란 명성이 적게나마 훼손됐다. 시장이 창업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명예회장의 경영복귀를 반기는 이유다. 누적된 경영철학과 현장능력이 재차 시너지를 발휘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Tip | CEO연구 -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

자수성가·파란만장한 삶…철학자로 불리는 경영자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의 청춘은 우여곡절로 점철됐다. 회고록에서 그는 “어떤 것을 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자학에 시달렸다. 그때 엉뚱한 선택을 했다면 인생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1955년 우연찮은 기회에 초자회사인 쇼후공업에 입사했다. 일본 최초로 고압초자를 만든 한때의 우량회사였다. 다만, 젊은 이나모리에게 직장 운은 그게 다였다. 이미 법정관리나 다름없을 만큼 경영상태가 안 좋았다. 의지할 데라곤 연구실뿐이었다. 외롭고 고독했지만 업무에 재미를 붙여갔다. 고진감래였다. TV 수요가 늘면서 그의 연구는 빛을 발했다. 입사 2년 후 결국 개발팀 지휘를 맡았다. 쇼후의 세라믹수요는 납기를 못댈 만큼 늘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터졌다. 회사가 대규모 춘투에 휘말릴 상황이 됐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의 부서만큼은 공멸을 이유로 춘투에 참가하지 않고 공장에 남아 납기를 지켰다. 결과 그의 명성과 기술력은 나날이 높아갔다. 결국 지인들의 권유와 출자로 1958년 쿄토세라믹을 창립한다.

승승장구는 계속된다. 교토세라믹은 창업초기 마쓰시타전기로부터 수주를 받았다. 이때 시장 확대가 불가피했다. 동시에 무명의 교토세라믹에겐 진입장벽도 대단했다. 돌파구는 해외진출이었다. 마찌코바(まちこうば·시내에 위치한 작은 공장)로 시작한 회사는 어느새 훌쩍 성장했다. 1966년엔 어렵기로 소문난 IBM 표준에 합격해 글로벌경쟁사를 제치고 집적회로용 기판을 2500만개 수주했다. 당시 임금인상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지만 이타정신에 근거한 파트너십 강화로 해결했다. 아메바조직은 이때 생겨났다. 

IBM과의 거래를 계기로 수출은 급증했다. 1971년 증권거래소 상장까지 끝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오일쇼크는 수주격감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교세라의 대가족주의는 지켜졌다. 임금 동결은 있었지만 감원은 없었다. 위기는 곧 극복됐다. 이를 계기로 회사는 다각화에 나섰다. 보석·절삭공구·인공뼈(관절)·태양전지 등 세라믹과 연관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2년엔 교토세라믹에서 교세라로 사명을 바꿨다. 이듬해엔 세계 최초로 일렉트로닉스 카메라를 만든 야시카까지 합병했다. 1984년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다. 전기통신사업의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DDI를 설립했다. 이동통신에도 도전장을 냈다. 여세를 몰아 2000년 국내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오늘의 교세라가 완성됐다.
성공과 동시에 그는 국경을 넘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나모리재단이 발족돼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교토상’을 만들고 J리그의 교토퍼플상가를 지원한 게 대표적이다. 모교에 대한 보답으로 거액을 기부하기도 한다. 경영철학 전수를 이유로 1980년 시작된 작은 연구회는 오늘의 ‘세이와주쿠’로 발전했다. 1991년엔 전국조직으로 확대된다. 세이와주쿠는 지금도 경영자들로 문전성시다. 그는 한때 출가(出家)를 감행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와 명예보단 선행을 원했던 결과다.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수행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넷째 사위다. 한국과의 인연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