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대 경제단체인 영국상공회의소(영국상의,BCC) 존 롱워스 대표는 지난 6일(현지 시각)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 지지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는 최근 각종 연설과 인터뷰 등에서 “영국은 EU에서 탈퇴해야 ‘더 밝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 “유권자들이 EU 잔류에 투표한다면, 그건 영국이 가망 없는 EU에 남는 것, 그것도 가장자리에나 앉게 되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그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영국상의 이사회는 그에게 대표직 일시 정지 처분을 내렸고 롱워스 대표는 다음날 대표직 사퇴를 발표했다.

영국상의가 최근 회원 2000명을 상대로 브렉시트 찬반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는 ‘EU 잔류’에 투표하겠다고 답했다. ‘탈퇴해야 한다’는 응답은 30%, ‘결정하지 않았다’는 회원은 10%였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영국상의는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롱워스 대표의 대표직 정지는 이런 조직의 공식 입장을 위반한 데 따른 것이었다.

롱워스 대표의 사퇴는 영국 정계에까지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집권 보수당에서 EU 탈퇴를 주장하는 세력은 캐머런 정권이 롱워스 대표에게 사퇴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정부와 영국상의 측은 “말도 안되는 흑색선전”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노라 시니어 영국상의 이사회 의장은 “어떤 정치인이나 이해 관계자도 그의 사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과 충돌은 영국 경제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기업이나 경영인은 EU 탈퇴가 불러올 문제점을 제기하고 EU 탈퇴 지지측은 이런 문제 제기에 강하게 반발하는 양상이다. 롤스로이스자동차의 토르스텐 뮐러-오트보스 최고경영자는 최근 영국 내 모든 임직원에게 “브렉시트는 각종 비용과 가격을 인상시켜 결국은 회사의 고용 기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회사의 고용이 줄어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편지는 독일 BMW 그룹의 영국 내 6개 자동차 회사 최고경영자가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라고 했다. EU탈퇴론자들은 “왜 독일의 글로벌 기업이 영국의 미래에 간섭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달엔 영국 대표 기업들의 경영인 200여명이 자신들의 서명이 담긴 서한을 영국 일간 더타임즈에 보냈다. 이들 경영인 200명이 운영하는 기업의 직원 수는 120만명에 달한다. 서명자 중엔 영국 통신회사인 BT, 대형 소매 체인인 막스앤스펜서, 아스다, 이동통신업체 보다폰, 히드로국제공항 등 영국 100대 기업 중 36개 기업의 이사회 의장이나 최고경영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 경영인들은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크게 우려했다. 그들은 서한에서 “영국의 비즈니스는 5억 명의 인구를 가진 유럽 시장에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래야 성장을 지속할 수 있고 투자와 일자리 창출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영인들은 “브렉시트가 현실화된다면 (해외로부터의) 투자는 중단되고 일자리는 위협받게 될 것”이라며 “결국 영국 경제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편지 내용이 더타임즈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EU 잔류를 주장하는 캐머런 정부는 “이렇게 많은 기업 경영인들이 뜻을 모은 것은 처음”이라고 환호했다. 반면, EU탈퇴론자들은 “편지에 서명한 기업인들은 여권에 기부금을 냈거나 캐머런 총리와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영국 경제가 브렉시트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살아나는 추세를 보이던 경제가 다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영국 경제는 금융위기 이전인 1997~2007년엔 평균 3.0% 성장했다. 그러다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을 받으면서2008년 -0.5%, 2009년엔 -4.2%로 추락했다. 이후 금융과 서비스 업종이 탄탄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살아나면서 영국의 GDP는 2010년 1.5%, 2011년 2.0%씩 성장했다. 특히 2014년 성장률(2.9%)은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영국 경제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국의 2015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2%로 전년도에 비해 0.7%포인트 떨어졌다. 영국중앙은행(BOE)은 이 같은 주춤한 성장세가 올해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올해와 내년의 GDP 성장률을 2.2%로 예상했다. 이처럼 영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더 안 좋은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이 영국 경제계의 깊은 고민이다.

세계 주요 연구기관이나 피치 등 신용평가회사들도 영국이 EU에서 탈퇴할 경우 영국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잇따라 경고했다. 브렉시트 이후 2030년까지 영국 GDP의 14.1%인 3134억 유로(약 426조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도 있다.

영국 일간 더타임즈는 지난 9일(현지 시각) 오는 6월 23일 실시되는 영국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가 결정된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상 시나리오를 내놨다. 외환시장에서 영국 파운드화는 20분 만에 5% 폭락하고 전날까지1.40 달러대였던 대(對) 달러 환율이 1.10달러까지 떨어질 것이란 전문가 진단이 시장을 지배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영국 기업인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일부 기류가 있다. “영국이 EU에서 벗어나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고, 경제도 더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다. 탈퇴론자들은 EU의 굴레가 영국 경제의 성장을 짓누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EU 탈퇴론과 잔류론이 팽팽히 맞서 있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탈퇴와 잔류 우세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달 초 시장조사업체 ICM이 전국 2000여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선 EU 잔류와 탈퇴 의견이 각각 41%로 똑같이 나왔다.

영국 언론들은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과 재무부가 브렉시트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비상대응계획(contingency plan)’을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브렉시트는 영국 금융계가 ‘정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 장일현
서울대 경제학과, 행정대학원 석사, 조선일보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기자, 현 조선일보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