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최대 제약사인 밸리언트가 실적 부진에 회계 부정 의혹까지 받게 되면서 뉴욕 증시의 다른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도 덩달아 빠지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캐나다 최대 제약사인 밸리언트가 실적 부진에 회계 부정 의혹까지 받게 되면서 뉴욕 증시의 다른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도 덩달아 빠지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사건이 지난해 가을부터 이어지고 있다. 바로 약값 폭리 문제다. 하룻밤새 약값을 대여섯배는 보통이고 수십배까지 단번에 올려버리는 일이 빈발하면서 자본주의 경쟁원리가 바이오 업계에서는 고사(枯死)해버렸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약값을 비이성적으로 올리는 기업들은 대부분 고수익을 추구하는 펀드에 넘어갔거나 제약회사지만 연구개발(R&D)을 통한 신약 개발보다 인수합병(M&A)을 통해 회사 덩치를 키우며 투자금을 끌어들이는 유형의 회사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정글 자본주의’가 바이오 업계에 접목되면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엔 이렇게 약값 폭리를 통해 회사를 키워온 비즈니스 모델이 한계에 부딪혀 위기에 내몰리고, 바이오 업계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발생했다.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는 캐나다 최대 제약사 밸리언트(Valeant Pharmaceuticals)는 요즘 월가(街)에서 가장 큰 화제를 뿌리고 있는 기업이다. 실적 부진에 회계 부정 의혹까지 겹치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다른 바이오 기업들 주가도 덩달아 빠지면서 미국 바이오 업계에는 ‘밸리언트’발(發) 악재로 ‘바이오 버블’의 붕괴가 시작됐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미국에서 약값 폭리 파문이 일기 시작한 건 지난해 9월이었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하룻밤새 약값을 50배나 올리는 제약사들의 횡포를 비판하며 약값 인상과정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약값 인상으로 폭리를 취해온 기업들이 된서리를 맞기 시작했다. 그해 8월 5일 밸리언트의 주가는 주당 262.52달러(약 30만5000원), 시가총액은 896억달러(약 104조원)였다. 그러나 밸리언트의 주가는 지난 15일 파산 우려까지 제기되며 하루 동안 51%나 폭락했고, 17일에도 하락세를 이어가며 결국 29.69달러(약 3만4000원)에 장을 마쳤다. 7개월 만에 주가가 89%, 시가총액은 93조원이나 줄어드는 타격을 입었다.


밸리언트의 최근 주가 폭락은 연간 사업보고서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기한 내에 제출하지 못함으로써 채권단이 디폴트를 선언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비롯됐다. 밸리언트의 채무는 300억달러로 시가총액의 세 배에 달할 정도여서 회사의 재무상태에 대한 시장의 우려는 계속 증폭되고 있다.

지난해 가을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약값 폭리에 대해 발끈했던 직접 계기는 밸리언트가 아니라 에이즈 치료제인 다라프림의 가격을 하룻밤새 한 알에 13.5달러에서 750달러로 올렸던 튜링제약(Turing Pharmaceuticals)이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은 “이 약을 사용해온 환자들의 연간 약값 부담이 수억원으로 올라가게 됐다”며 비판을 쏟아냈고,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제약사들이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약값으로 폭리를 취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바이오 의약품에 대한 자료 독점권 기간을 줄이고 의약품 수입을 촉진하는 내용 등을 담은 공약을 발표했다. 마틴 슈크렐리(32) 튜링제약 최고경영자(CEO)는 다라프림의 약값 대폭 인상 이전인 2014년에도 신장 약 사이롤라의 독점권을 확보한 뒤 한 알 당 가격을 1.5달러에서 30달러로 20배나 올린 ‘상습범’이었다. 이후 약값을 급등시킨 제약사들에 대한 당국의 조사가 이어졌고 바이오 주가는 약세를 면치 못했다.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슈크렐리는 지난해 연말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다단계식 금융 사기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또 한 번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슈크렐리는 자신이 운영했던 헤지펀드에서 거액의 손실이 나자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투자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수익금을 주는 형태로 돈을 끌어모으는 다단계 ‘폰지’ 사기 수법을 사용한 혐의를 받았다. 제약사와 독점 의약품이 슈크렐리 같은 ‘금융 기술자’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미국인들이 느끼게 된 것이다.

사실 시장에서 잊혀 가던 약을 사들여 새로운 전문의약품으로 재탄생시키며 가격을 팍 올려버리는 수법에 있어서는 밸리언트가 튜링보다 한참 선배였다. 다라프림의 약값 인상 사태가 터지기 전 밸리언트는 마라톤제약으로부터 이수프렐과 니트로프레스라는 심장질환 약의 독점권을 사들인 후 약값을 각각 525%, 212% 올려 의회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때 밸리언트를 조사한 두 명의 의원 중 한 명이 ‘정글 자본주의’의 개혁을 주장하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주)이었다. 약값 폭리의 심각성은 사실 샌더스가 클린턴보다 먼저 지적했던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밸리언트에 대해 “장밋빛 회사 전망을 위한 매출 부풀리기와 무리한 기업 M&A, 폭리를 위한 약값 인상 등으로 일찌감치 문제를 잉태해왔다”고 비판했다.

밸리언트는 21일 CEO를 교체하는 등 회사 정비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23일 주가는 주당 33.43달러까지 회복됐지만 바이오 업계 전체를 감돌고 있는 위기감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밸리언트 사태 여파로 전문의약품 업체 엔도, 바이오 기업 호라이즌, 말린크로트 같은 기업들의 주가도 모두 작년 8월에 비해 반 토막 이하로 떨어져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3월 들어 S&P500지수가 상승하며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는 가운데 바이오 업체 주가 폭락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미국 바이오 업계의 불안이 계속되면 바이오 사업의 미국 증시 상장을 추진하고 있는 삼성물산의 계획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김덕한
서울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석사, 조선일보 산업부,사회정책부, 현 조선일보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