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평가 실시간 반영해 즉각 개선…

  

객실 시계 ∙ TV 없앤 ‘상식파괴’로 성공




일본은 정체된 국가다. 성장추세엔 브레이크가 걸렸고, 성장씨앗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최근 지하에 묻힌 전설적인 경영자를 재조명하고 탁월한 가치실현에 성공한 감춰진 최고경영자(CEO) 발굴에 안테나를 곤두세운다. 한계가 많고 장벽이 높을수록 이들 CEO의 성공DNA가 부각되는 건 당연한 논리귀결이다. 사양 산업인데도 놀랄 만한 경영업적과 청사진을 지닌 젊은 CEO라면 십중팔구 주요 언론의 분석타깃에 오른다. 이들이 잃어버린 일본의 방향감각을 일깨워줄 힌트를 제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호시노 리조트’의 4대 사장 호시노 요시하루도 이들 중 한명이다. 일본의 레저업계는 대표적인 침체산업 중 하나다. 1980년대 후반 거품이 잔뜩 낄 때 과잉투자가 이뤄지면서 수급이 근본부터 깨져버린 결과다. 일각에선 버블 생성 ∙ 붕괴의 상징산업으로까지 묘사한다. 투기열풍의 진원지이자 버블 붕괴의 최전선이 레저업계에 중첩된 결과다. 그만큼 호시노 리조트의 경영실적과 가치추구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이가 호시노 사장이다. 1991년 가업을 물려받아 사장에 취임한 이래 놀랄 만한 성공스토리를 써왔다. 최근엔 경영파탄에 빠진 리조트까지 인수해 사세를 확장했다. 그를 두고 세간에선 ‘리조트의 부활달인’ 혹은 ‘리조트의 카리스마’로 부른다. 파탄 직전의 리조트라도 그가 나서면 순식간에 변신해서다. 덕분에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쟁업체는 나날이 증가세다. 부활명장의 막강파워다.



호시노 리조트는 업계 전통적인 운영상식을 완전히 깨버렸다. 파괴 이유는 고객만족 향상을 위해서고, 그 실천수단은 스태프의 동기부여로 요약된다. 호시노 사장은 이를 ‘개혁’으로 명명했다. 영업현장에 반영된 개혁결과는 파격적이다. 일단 풍경이 달라졌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게 리조트의 묘미라는 생각에 객실에 시계 ∙ TV 등을 없앴다. 1박 ∙ 2식이라는 기존상식조차 고객을 속박할 수 있다고 여겨 과감히 박식(泊食)분리 요금체계를 도입했다. 여관외부 레스토랑에서도 누구든 식사를 즐기도록 배려한 것이다. 24시간 룸서비스도 기존관행을 깼다. 덕분에 직원은 철저한 1인 다역을 추구한다. 한명의 스태프가 청소부터 접수 ∙ 시중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투숙수속과 식사시간 등도 철저히 고객요구에 맞춘다. 물론 비용은 확실히 비싸다. 도쿄 인근의 유명온천지 일류시설조차 1인당 요금이 2만~3만 엔인데 호시노 리조트는 최대 2배 이상이다. 주말이면 최저가격이 4만 엔대다. 그래도 손님은 줄지어 찾아온다. 특히 재방문 비율이 높다.



모든 건 실적이 말해주는 법이다. 호시노 리조트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혁이 실적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현재 호시노 리조트의 연간매출은 100억 엔대에 육박한다(2008년 85억 엔). 1990년대 초반보다 3~4배 늘어났다. 그것도 불황직격탄에 고전 중인 업계에서의 성적표다. 특히 금융위기 잔영이 컸던 2009년에도 운영 중인 14개 숙박시설 중 13개에서 이익을 냈다. 지금은 일본전역에 23개의 리조트·온천시설을 경영 중이다. 



핵심은 ‘고객만족’이다. 고객만족을 통한 이익증대가 사업목표다. 즉 고객만족과 이익증대의 양립이다. 출발점은 고객만족이다. 고객의 직접적인 설문조사를 기초로 목표치를 정해 이를 달성하는 게 경영의 최우선 과제다. 하루하루 고객평가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즉각적인 개선작업에 착수토록 시스템을 갖췄다. 독자적인 고객정보시스템으로 개별고객의 요구에 맞춘 눈높이 접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례로 ‘호시노야 카루이자와’는 외국계 고급호텔조차 신경 쓰는 최고급 여관이다. 초기부터 내로라하는 일류 외국계 경쟁사와 비슷한 레벨의 단가 ∙ 서비스를 모토로 내건 덕분이다. 다만 경쟁상대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일본인이 해외에서 머무는 일류 리조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CEO는 “일본인은 해외에 나가지 않으면 왜 일류 리조트에 묵지 않을까”다. 즉 해외에선 일류 리조트를 선호하면서 왜 국내에선 그렇지 않을까에 대한 자문이다. 그래서 고급화 전략이 나왔다. 



그가 고객만족을 절체절명의 실천화두로 삼은 배경은 시대상황과 개인이력에 힌트가 있다. 4대 CEO인 호시노 사장(1960년생)은 유명 온천지인 카루이자와에서 여관업을 하던 집안출생이다. 1914년 개업한 노포(老鋪)답게 꽤 유명한 여관이었다. 1970~80년대엔 부친이 ‘고원교외의 결혼식’ 개념을 소개하며 리조트웨딩 붐을 일으켰는데, 이게 일약 전국적인 유명세로 연결됐다. 다만 90년대 접어들며 버블붕괴 후 온천경영은 본격적으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업 부활의 임무가 4대에게 떨어졌다. 1991년 일이었다. 이후 호시노온천은 1993~94년부터 경쟁업체보다 돋보이는 경영실적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4대 사장의 경영참가는 1988년 부사장 직함 때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6개월 후 그는 돌연 퇴사했다. “기업으로 탈피하기 위한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총론찬성 ∙ 각론반대에 부딪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그가 복권된 건 순전히 시대요구였다. 당시 시장개방으로 외국계 자본의 대규모 시장진입이 본격화되면서 20여명의 주주로 운영되던 호시노 일족의 위기감은 상당했다. 주주들이 선택한 돌파전략은 4대의 경영복귀였다. 미국유학과 은행경력을 높이 산 선택이었다. 이때 그는 복귀조건으로 ‘이사진 교체’를 내걸었다. 부친이 반대했지만 결국 사장에 취임했다. 정작 문제는 영업현장에서 불거졌다. 기존직원의 싸늘한 반응이 대표적이다. 아들이 사장이라도 ‘오너=부친’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직원관리는 엉망이 됐다.

- 호시노야 카루이자와의 식사
- 호시노야 카루이자와의 식사

실력으로 경영검증 …‘위탁경영 승부사’

이때 그를 구원해준 게 미국유학 때 배운 ‘고객만족도 조사’였다. “도련님 의견에는 반발해도 고객의견까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효과는 절묘했다. 프로의식을 지닌 사원을 중심으로 고객의 엄격한 지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동기부여를 위해 수치화된 달성목표를 제시했고 또 인사평가에 반영했다. 이익이 조금이라도 나면 사원급여에 환원했으며, 손님이 적은 겨울에는 2주간 연속휴가까지 도입했다. 이때부터 반발은 줄어들었고 서비스 품질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일련의 개혁과정을 거치며 실적이 개선됐다. 가령 하락일로였던 결혼식 사업은 식사내용부터 신부부케까지 개별요구를 주도면밀히 반영해 실적향상에 기여했다. 개혁은 계속됐다. 2005년에는 온천을 새롭게 개장해 ‘호시노야 카루이자와’로 명칭을 변경했다. 최고급 일본여관으로의 변신이 개장작업의 목적이었다. 돈은 많이 들었지만 선택은 옳았다.



다만 질시는 어쩔 수 없었다. CEO의 경영업적을 둘러싼 반신반의가 그렇다. 실제 관광지로서의 입지조건이 탁월한 카루이자와에 위치했으며 그나마 유명하던 가업을 물려받았기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성공했을 것이란 추정이 많았다. 게다가 물 좋은 온천까지 가졌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젊은 CEO는 결국 승부수를 띄웠다. 가문후광과 행운이 아닌 진정한 실력검증에 대한 갈증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무너져가는 호텔 ∙ 리조트의 화려한 변신 아이템이었다. 여기엔 그간 회사가 고안 ∙ 축척한 경영노하우에 대한 자신감도 한몫했다.



리조트 부활명장으로의 화려한 변신은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 일례로 2001년 유통업체 마이카루의 ‘리조나레 코부치자와’를 매수해 어른도 즐기는 패밀리리조트로 변신시켜 3년 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2003년 ‘아르츠반다이 리조트’에 이어 2004년 ‘알파리조트 토마무’를 모두 V자 회복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호시노 리조트에 ‘리조트 재생공장’이란 이미지를 각인시켜준 일련의 성공사례다. 이후에도 수십개의 노포여관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개혁미션을 수행했다. 대부분 직접적인 자본참여보다는 경영수탁을 받는 형태로 진행됐다.



명성이 확산되면서 아예 소유까지 제안하는 오퍼가 적잖게 늘었다. 다만 위탁경영은 몰라도 직접소유는 꽤 신중한 편이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호시노야’의 다점포 전개가 브랜드전략으로 괜찮은지 미지수라는 입장이다. 상승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날카롭다. 그래서 필요하면 외국계 큰손 펀드와 손잡는 전략을 택했다. 대형 리조트의 잇따른 매수와 성공변신은 일약 그를 차세대 유망 CEO로 탈바꿈시켰다. 손만 대면 파탄 직전의 영업현장이 순식간에 흑자전환 마술을 부리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질시는 존경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고, 그의 아이디어는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그가 인지하는 파탄에 봉착한 리조트의 공통점은 하드웨어를 중시한 과잉투자 물건이란 점이다. 대신 더 중요한 관건은 고객이 또 오고 싶어 하는 노하우와 운영구조를 구축하는 소프트웨어에 있다. CEO는 “착실히 쌓아올린 소프트웨어야말로 회사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 교토 호시노 리조트(위)와 호시노야 카루이자와 리조트.
- 교토 호시노 리조트(위)와 호시노야 카루이자와 리조트.

미래비전과 정보 공유로 위기 돌파

4대 사장의 첫 행보는 가시밭길 천지였다. 개혁초기 반발은 상당히 거셌다. 실적부담 때문이었는지 스스로도 악수를 뒀다. 가령 강력한 경쟁력을 모토로 내건 까닭에 의사결정을 일률적인 톱다운 형태로 진행했는데, 이것도 패착이었다. 연봉도 낮고 휴일도 적은 스태프들에게 희생만 강요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니 100명 직원 중 3분의 1이 퇴사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비전은 꺾지 않았다. 스스로 “본인 판단이 틀리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만둬선 안 될 인재마저 사표를 들고 찾아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떠나는 직원을 붙잡을 돈도 없었고 감정에 호소할 배짱도 없었다. 그래서 꺼내든 게 명확한 미래비전과 정보공유였다. 믿고 따라오면 최단기간에 비전을 달성할 것이란 모습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신뢰증거로 현장재량권을 완벽히 일임했다. ‘현장주의’의 실현이었다. 이후 근무공간에 잃었던 웃음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먼저 케케묵은 조직도를 뜯어고쳤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피라미드 조직구성을 과감히 포기했다. 말하고 싶은 건 말하고 싶은 이에게 직접 말하라는 원칙하에 연령 ∙ 성별 ∙ 직위 위에 관계없이 전체직원이 수평입장에서 논의하도록 기업문화를 조성했다. 그래서 회사 조직구성은 축구팀으로 자주 비유된다. 총지배인 밑의 팀장이 지휘 ∙ 통솔하되 개별직원은 선수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득점(목표)을 추구해서다. 또 총지배인과 팀장(Unit Director)은 입후보제로 선출된다. ‘실력을 갖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맡긴다. 신입사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희망자는 연 2회 실시하는 입후보 프레젠테이션 대회에 참가해 목표하는 팀 이미지와 실천전략 등을 발표하면 이후는 투표로 결정된다. 현직자보다 뛰어나다고 판단될 때 취임이 결정된다. 경직화된 연공서열 대신 활력 넘치는 조직구성을 갖출 수 있는 배경이다. 경영정보 공유와 자유로운 의견교환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다. 개별사업소에서 매월 실시되는 정례사내회의가 그렇다. 원래는 간부직원의 경영전략 진척확인과 관련논의를 위한 장이었는데 이젠 누구든 자유롭게 참가하도록 문호가 개방됐다. 이 회의에서는 경영과 관련된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모두 오픈 ∙ 설명한다. 논의의 투명성을 높이고 결론의 납득성을 강화함으로써 주인의식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Tip. CEO탐구 | 호시노 요시하루

1등 할 때까지 노력하는 ‘집념의 승부사’

<닛케이비즈니스>는 2004년 인터뷰에서 호시노 요시하루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지기 싫어하는 도련님이 부모에 대한 반항을 계기로 프로의 길을 걷다 시대흐름과 맞물려 재능을 피웠다’고. 실제 4대 사장 호시노 요시하루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의 1등 지향은 본능에 가깝다. 형의 일을 거드는 공인회계사 동생은 “어릴 때부터 뭐를 해도 1등을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며 “형은 1등을 할 때까지 노력해 반드시 그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마케팅전문가인 아내의 증언도 비슷하다. “목적달성에 도움이 된다면 몇 년이 걸리든 반드시 해내는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라며 “이게 호시노 리조트의 강점 중 하나일 것”이라고 아내도 거든다.



그는 1960년 나가노 가루이자와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명문사학인 게이오 계열을 다닌 까닭에 ‘게이오 보이’로 불린다. 일본에선 재력이 탄탄한 가문 출신이 선호하는 대학이며 실제 유력경영자를 대거 배출했다. 1983년 게이오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도쿄시내의 유명호텔에서 1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다. 1984년 유수 호텔리어를 배출한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대학원에 들어가 심화교육을 받았다. 대학원 시절 영어 때문에 상당히 고전했다. 최초 6개월은 하루 수면시간이 1~2시간일 정도로 영어토론에 사활을 걸었다. 졸업 후 미국 호텔(일본계)과 건설사의 합병 프로젝트 임무를 경험한 후 1987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부사장으로 회사에 들어왔지만 반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유학 시절 인맥 덕분에 시티은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1991년 사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2년 6개월을 일한 은행에서의 담당업무는 투자회수였다. 각박하게도 그 대상은 리조트였다. 와중에 망하는 리조트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파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직접 확인했다. 사장 복귀 후 이 경험 ∙ 노하우가 결정적인 메리트가 된 건 물론이다. 



취미는 스키와 아이스하키다. 특히 아이스하키는 그에게 자신감의 근원이자 적잖은 성공경험을 안겨준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된다. 아이스하키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 중학교 땐 전국대회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도 전국체전에 3년 연속 출장했으며 대학 시절도 줄곧 개근한 아이스하키 예찬론자다. 등산도 자주 즐기며 스키는 늘 ‘딸과 함께’다. 도쿄사무실로 출근할 때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자연파다. 담배는 피지 않는다. 담배에 대한 경계감은 각별하다. 홈페이지 채용정보를 클릭하면 제일 먼저 ‘당신은 담배를 태웁니까?’라는 화면이 뜬다. ‘예스(Yes)’를 클릭하면 흡연자는 채용불가라는 양해문구가 나올 뿐이다. 굳이 입사하겠다면 금연맹세가 전제조건이다. 실제 흡연자 입사사례는 없으며 전체직원이 금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