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0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한국의 날에는 한국 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2015년 9월 20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한국의 날에는 한국 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현재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 176여개 국가, 720만명에 달한다. 전 세계 곳곳 한국인이 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은 세계에서 인구수 대비 가장 많은 재외국민을 가진 나라다. 재외동포들은 주로 중국, 미국 그리고 일본에 집중돼 살고 있으며, 이들 3개 지역이 전체 재외동포수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작은 비중이긴 하지만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먼 곳인 라틴아메리카에도 현재 약 10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주로 브라질(약 5만명)과 아르헨티나(약 2만2000명)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구한말인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33명의 노동자들이 일본 인력송출회사의 사기계약에 속아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껜(선인장의 일종) 농장에 도착한 것이 효시가 됐다.

척박한 환경과 노예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다수의 이민자들은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재이동 하면서 남미전역으로 흩어졌다. 이후 1957년 중립국을 택한 57명의 전쟁포로들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정착했으나 라틴아메리카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한국과 라틴아메리카 국가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된 1960년 이후다.

1962년 해외이주법 제정으로 해외이민사업이 활기를 띠고 일본의 남미이민 성공담으로 해외이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남미이민바람이 불었다. 1963년 브라질 영농이민단 17가구, 1965년 파라과이 영농이민단 35가구 그리고 아르헨티나 영농이민단 13가구가 각각 배정된 농장에 도착했다.

반세기 훌쩍 넘긴 이민 생활
그러나 이들은 말만 영농이민단이었지 대다수가 도시출신의 중산층 이상이었고 농업경험과 기술이 전혀 없는 농업에는 문외한들이었다. 원래 배정된 농장에서는 변변한 농기구조차 갖추지 못했고 주거환경은 열악했으며 교육조차 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따라서 황무지 개간은커녕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아르헨티나 리오네그로주의 라마르께 농장에 정착했다는 은명희씨는 “말이 농장이었지 허허벌판이었고 처음엔 살 곳이 없어서 천막을 짓고 살았고, 일행 중 한 분은 하도 굶주려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채소 대신 농장에 난 풀을 식재료로 쓰는 것을 보고 현지 매스컴에서 ‘소가 먹는 풀을 먹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기사로 다룬 에피소드도 있다. 결국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농장을 포기하고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순시온과 같은 대도시로 재이주해 도시 노동자가 됐다. 도시로 향한 무일푼의 이민자들은 도시 외곽의 빈민가에 터전을 잡고 생존을 위해 가장 밑바닥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고단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타지 생활은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9월 20일 아르헨티나에서는 한인이민 5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의 날’ 행사가 10만명에 가까운 인파들 속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1965년 8월 네덜란드 국적의 보이스벤호를 타고 부산항을 출발했던 13가구 78명은 50년이 지난 오늘날 3만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다문화 가정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무려 5만명에 달한다. 수적으로 볼 때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요한 이민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이민 50주년행사를 위한 조직위원회의 백창기 위원장은 “이번 행사의 의의가 지난 50년에 대한 축하와 감사 그리고 새로운 50년을 위한 출발의 전환점에 있다”고 말했다.

이병환 한인회장 역시 축하사에서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고 지구 반대편에 훌륭한 이민공동체를 건설한 초기 이민개척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고향을 떠나서도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 번영된 조국과 한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내준 아르헨티나 사회에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삶을 선택해야만 했던 초기 이민자들은 자본이 없었던 관계로 1967년부터 편물이나 봉제 삯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비제가스나 레띠로, 109촌(109번 버스 종점) 등 빈민촌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가내수공업 형태로 밤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일했다.

1970년대 중반에 도착한 새로운 이민자들은 당시 수입이 좋았던 봉제업에 뛰어들었고 한인경제에서 의류업은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되기 시작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의 빈민촌에서 편물과 봉제 삯일로 시작한 의류업은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부지런함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아르헨티나 의류시장의 40%를 점유할 만큼 성장했다.

1980년대 중반 심각한 경제위기에 봉착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경제위기 타계책의 하나로 이민법 개정을 통한 투자이민유치를 적극 추진했다. 이 시기 한인이민자들의 유입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자본이 풍부했던 새로운 이민자들은 전직과 상관없이 이민선배들이 이뤄놓은 의류업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현재 아르헨티나 교포의 90% 이상은 직간접적으로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2000개에 가까운 의류도매상이 밀집해 있는 아르헨티나 최대의 의류도매상가 지역인 아베야네다 상가의 60~70%가 교민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 재아한인들은 아르헨티나 패션의류산업의 전 과정에 진출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패션의류업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최근에는 패션디자인과 유통 그리고 경영을 전공한 교민 2세가 1세들이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어 보다 큰 성장이 기대된다.

가난한 빈민가에서 시작했던 한인들의 이민생활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현지인의 평균소득보다 월등히 높은 경제적 수준에 도달했다. 또 사회적 지위와 교육수준도 높아져 현지사회로부터 성공한 이민공동체로 평가받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한인 이민공동체가 다른 이민 공동체와 구별되는 점은 강한 민족정체성에 있다. 다른 이민공동체들이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빠르게 상실하고 쉽게 현지화됐던 것과 비교해 한인들은 한국어 그리고 전통적인 관습과 문화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이민 1세대는 이민 2세, 3세들이 뿌리를 잊지 않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인 후세대에게는 물론 현지인들에게까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심어주는 노력을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학교는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현재 유치원생 150명 그리고 초등학생 170명이 오전에는 스페인어로 된 현지교육과정을, 오후에는 한국어와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한국어로 배우고 있다.

K팝 등 한류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한국문화원과 한국학교의 토요한글학교는 한글과 한국문화를 배우는 현지인들의 발걸음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올해에는 이민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아르헨티나 한국학 학자들이 보는 한인이민사회’라는 주제로 한인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지구의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데에는 한국경제의 발전 그리고 한국대중문화의 영향력 증가와 함께 성공한 교포기업인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역할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의류업으로 성공을 거둔 정기웅·이윤희 부부는 현지에서 한국 알리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의류업으로 성공을 거둔 정기웅·이윤희 부부는 현지에서 한국 알리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성공한 한인기업인 현지에 한국 알리기 열성
원단을 생산하고 수입하는 아르헨티나 기린아 텍스(Kilina Tex)의 대표 정기웅·이윤희 부부는 현지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일에서만큼은 부창부수다. 크고 작은 교민사회의 문화행사와 차세대 교육사업을 위한 지원은 물론이며 현지사회에 한국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한국학연구를 지원하는 활동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하고 있다.

특히 정기웅 대표는 대학의 한국어수업과 한국학 연구를 지원하는 이유를 “한명의 지한파를 만드는 데 교육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면서 한국학 활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이민 오기 전까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현지사회에 한국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부인 이윤희씨는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코윈) 아르헨티나 지역관을 역임하던 2013년 한-아르헨티나 외교수립 50주년 기념 행사인 ‘비바 아리랑’을 개최했다.

이 행사는 한국의 문학, 조각, 회화, 미디어 아트, 음악 등의 전문가가 참여해 한국이 전통과 첨단기술이 공존하는 글로벌 문화강국임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 성공적인 행사 이후 경제동물로만 비쳤던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뛰어난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켜온 문화민족으로 바뀌었다.

이들 부부는 한인들이 아르헨티나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고 잘 살 수 있는 데에는 우리 민족 특유의 부지런함과 재능도 물론 있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따뜻하게 받아주고 아르헨티나 사회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직원복지에 힘을 쏟고 현지 지역사회를 위한 작은 지원사업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디아스포라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이방인과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손님이며 타자인 것이다. 그래서 이민자들 특히 이민 1.5세대와 2세대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갈등을 겪는다. 경계인으로서의 삶이 자존감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의 한인이민 반세기를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이번 ‘한국의 날’ 행사의 성과는 현지인들에게는 한인이민자들의 성공과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줬고 이민 2세대들에게는 한민족으로서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줌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